박은정 기자2017-05-18

화상으로 인해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지만 "평생 나와 같은 장애인들을 섬기겠노라" 다짐하며 장애인 사역에 앞장서는 목회자가 있다. 바로 자오나눔선교회의 양미동 목사가 그 주인공. 장애인을 향한 남다른 섬김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는 양 목사의 헌신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렬한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복음…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양미동 목사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예수님을 거부했던 청년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어린 아들을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만화방을 운영했던 양 목사는, 어느 날 가게 안에 있던 난로가 불에 타면서 전신 화상을 입고 말았다. 사고로 인해 양 목사는 22번 수술대에 올랐고 그의 왼쪽 다리는 일부 절단됐다. 살지 못할 거란 의사에 판단에 그의 곁을 지켰던 아내마저 14개월 된 아들을 두고 떠나버렸다. 결국 양 목사는 지체장애 1급이란 판정을 받고 퇴원을 했다. 병상에서 죽음의 문턱을 헤매던 양 목사가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건 부천 목양교회 찬양팀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양교회 찬양팀이 매주 양 목사의 병실을 찾아 말 동무가 돼주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이다. "매주 교회 청년들이 저에게 와서 찬양을 하고 말씀을 ▲자오나눔선교회 양미동 목사ⓒ데일리굿뉴스 전하는 데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더 이상 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렇게 1년이 되던 날, 갑자기 제 입술에서 찬송이 흘러 나왔어요. 그 순간 완전히 무너졌죠. 어릴 적 교회에서 얼핏 들은 찬송이 입에서 흘러 나오면서 닫혔던 저의 마음이 열린 겁니다." 이후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이어오던 그에게 대구의 한 단체가 진행한 '장애인 간증수집 콘테스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에 건축헌금을 내고 싶단 마음에 '주님 내게도 들을 것이 있습니다'란 제목으로 간증 수기를 올린 것이 대상을 받게 된 것. 그때부터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위해 살고 싶단 비전을 갖게 됐고, 교회의 도움으로 1996년 5월 '자오나눔선교회'라는 장애인 선교 및 봉사단체를 설립하게 됐다. 그는 1995년 11월 소록도 한센병자를 찾아 봉사활동 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월간나눔>이란 선교지를 매월 제작해 장애인과 군부대, 교도소에 무료로 발송하는 것은 물론 ▲1998년부터 안양교도소를 방문해 장애인 재소자들을 위한 예배 및 상담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교정선교를 할 때는 예배만 드리고 오지 않습니다. 재소자들과 함께 성경필사도 진행하고 있어요. 필사를 완성한 분에게는 영치금도 전달해드리죠. 교도소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재소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전하시더라고요. 성경필사만 3~4번 한 분도 있습니다." 대문 없는 쉼터…"누구나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도록" 현재 양미동 목사는 경기도 화성에 '자오쉼터'를 세우고 8명의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제가 장애인이 되다 보니 장애인들의 열악한 환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가족들마저 장애인들을 관리하기 어려워 방 안에 방치하곤 하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인들끼리 한 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처음에는 재정도 없어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곳에서 도움을 받아 현재 16년째 장애인 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자오쉼터에 머무르는 장애인들은 모두 지체 장애인 1, 2급. 대다수 다른 장애인 시설에서 적응 문제로 자오쉼터로 왔지만 오히려 자오쉼터에서는 별탈 없이 생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오쉼터에는 대문이 없어요. 장애인 분들이 자유롭게 생활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통제하지 않는 거죠. 예배 시간만 통제할 뿐 모두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도록 하니까 다른 시설보다 여기서 평안을 얻는 것 같아요." 양 목사는 최근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보건법이 바뀌면서 장애인들이 장애 등급에 따라 요양원으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양 목사는 "하나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10인 이하 장애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요양시설을 쉼터 옆에 세워 장애인들이 맘껏 생활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며 "장애인 사역을 위해 성도님들의 기도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김주련 기자2017-06-11

최근 기독교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1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한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故 서서평 선교사의 헌신적 삶을 통해 감동을 전했던 이 영화에서 단연 주목을 받았던 배우가 있다. 바로 서서평 선교사를 연기한 윤안나 씨다. 20대 독일 소녀가 105년 전 ‘푸른 눈의 어머니’라 불렸던 서 선교사를 연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신앙계 6월호를 통해 그를 만났다. “분단의 아픔 가진 한국, 독일 생각에 더 마음갔죠” 배우 윤안나 씨는 15살 때 독일에서 베트남 친구를 통해 한국문화를 접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무작정 한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 “마침 아버지가 장로로 계셨던 교회가 한국교회와 연결이 돼 있었어요. 한국과 독일이 교류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유산의 장소를 방문하던 중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38선에 있는 DMZ를 보고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바로 지척에 있는 북한의 모습을 보며 분단의 실상을 깨달은 윤안나 씨.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던 독일과 같은 아픔을 가진 한국에 더욱 마음이 갔던 것이다. 한국의 첫 방문 이후 한국에 다시 오고 싶은 마음에 5달 동안 밤낮 없이 한국어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해 여름방학 때 또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한 달 동안 혼자 한국의 거의 모든 박물관을 갔고 한국문화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다른 과목 보다도 언어 공부에 매진했다. 전공도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했고 부전공으로 한국학을 공부했다. 윤 씨와 한국과의 인연은 5년전 그가 한국영화와 배우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며 이어졌다. “평소 한국영화가 너무 좋았고 배우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기회가 왔을 때 기도의 응답이라 생각하고 잡았죠.” 서서평 역할, 예수님 사랑·인생의 모토 깨닫게 해줘 배우의 꿈을 키워오던 윤 씨는 지난해 7월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만나게 된다. 독일 대학 재학 시절 한국학과 조교로 일하며 인연이 된 한국인 교수의 권유로 서서평 선교사 역할에 지원하게 된 것. “사실 사람들이 한국에서 네가 맡을 만한 역할은 외국인 며느리 정도의 한정된 역뿐일 거라고 해서 낙심하게 된 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는 집 어머니께서 ‘한국 역사를 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일군 것들이 많았다’며 ‘네가 꼭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너무 훌륭하신 서서평 선교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죠. 많은 격려가 됐어요.” 그는 서서평 선교사를 통해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또 배우로서의 인생 모토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같은 독일인으로서 부끄러웠어요. 서서평 선교사님의 삶을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됐거든요. 제 삶을 되짚어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서 선교사님이 남긴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라는 말처럼 감사로 시작했던 첫 마음을 기억하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한연희 기자2017-06-25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신도수 14만 4천명 달성'이란 조건부 종말론을 내세우며 급성장했다. 이단전문가들은 신천지가 목표로 한 인원이 어느 정도 채워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교묘하고 공격적인 포교 활동으로 정통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신천지의 실태를 신천지대책전국연합 신현욱 목사에게서 들어봤다. "17만 명 넘어선 것으로 예측" 신현욱 목사는 "초창기에는 교적부를 써서 낸 사람들로 해서 딱 14만 4천 명이 목표였다"면서 "그 교적부를 채우기 위해 한 지파당 1만 2천 명씩 열심히 매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젠 그 숫자를 넘어서 17만 명 정도가 됐다”며 “그러다 보니 교리가 바뀌었다. 14만 4천의 기준이 까다로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천지는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는 기준을 '신도'에서 '인 맞은 자'로 바꿨다. 6개월간 신천지 교리 교육을 받은 수료자들을 '인 맞은 자'라 칭하는데 이들 14만 4천명이 모여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울수록 미혹의 역사는 더 횡행할 것"이라며 "잘못된 교리에 중독이 되면 직장을 포기하고 심지어 가출하고 이혼하고 가정을 파탄을 내면서도 모르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이영호 목사(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는 "교주의 말만 들으면 천당 가고 구원 받는 것으로 인식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죄악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말했다. 이단 전문가들은 "신천지의 조건부 종말론이 신도들로 하여금 전도인 추수에만 매달리게 한다"며 "때문에 가정 파괴와 사회분열 등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위장교회 형식으로 정통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며, 청년들을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만희 교주 사후 집단 탈퇴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상담 및 신앙 재교육을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신 목사는 "잘못된 성경공부, 이단 사설을 분별하지 못해 빠진 거니까, 그들에게 성경을 통해 바로 복음과 진리를 깨우쳐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만희 교주 사후에 집단으로 신도들이 탈퇴할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면서 "전문 상담사들을 양성하고 상담소를 많이 세워서 그들이 나와서 방황하는 일들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신현욱 목사와의 자세한 인터뷰 내용과 신천지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GOODTV 글로벌선교방송단 미니다큐 〈구리초대교회 편-신천지 해부, 비상구는 있다〉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박은정 기자2017-06-09

지역주민들에게 '보물단지'라 불리는 교회가 있다. 인천 도원동에 자리한 인천제2교회는 지역 비거주자 교인이 전체 90% 이상을 차지하지만, 모르는 주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교회 문턱을 낮춘 섬김과 나눔으로, 주민들과의 끈끈한 믿음을 쌓아가는 인천제2교회에 다녀왔다. "교회에 묵은 때 벗기러 왔어요"…이색 사역 '눈길' 인천제2교회(담임 이건영 목사)에는 매주 화·목요일 1시만 되면 지역 어르신과 노숙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교육관에 오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명단에 적고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어떻게 오셨느냐' 물었더니 '목욕하러 왔다'고 한다. 인천제2교회는 지역주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다. 남자는 매주 화요일, 여자는 매월 첫째·셋째 주 목요일 1시부터 3시 30분까지 이용 가능하다. 교회는 수건과 때 타올, 칫솔도구 등 간단한 목욕용품을 어르신들에게 제공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차와 음료도 대접한다. 목욕하고 나온 어르신들에게는 성도들이 기증한 옷을 깨끗이 세탁해 주민들이 원하면 옷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다. 장옥분 어르신은 "이 동네에 목욕탕이 있긴 하지만 너무 멀고 돈도 많이 들어 잘 가지 않았다"며 "그런데 교회에서 목욕탕도 열고 공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서 매주 온다. 게다가 교회에서 맛있는 식사까지 대접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특히 목욕탕 사역을 섬기는 교회 성도들은 어르신들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수다도 떨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교회 목욕탕을 찾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교회의 '사랑나눔터'에서 밥을 먹고 온다. 사랑나눔터는 노숙인과 독거노인 등 따뜻한 한 끼 식사가 간절한 이들에게 매주 화·목·금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하루 평균 150여 명이 찾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곳이 교회가 맞나"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 1층 로비에 놓여진 안내표지판을 살펴보면 교회 안에 장애인 치료기관인 삼일특수교육센터을 비롯해 꿈나래어린이도서관, 드림 헬스장 등이 있어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향민·외국인 노동자 등 소외 이웃 섬김에서 시작 현재 인천제2교회는 총 20여 개의 나눔 사역을 펼치고 있다. 교회가 이 같은 활발한 사역을 펼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창립정신이 깃들여 있다. 인천제2교회는 1948년 인천에서 두 번째 세워진 장로교회다. 교회를 개척한 고 이승길 목사는 6·25 전쟁 직후 남편과 가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교회 안에 '마르다 모자원'을 세웠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아픔을 끌어안은 첫 사역이다. 2대 담임목사였던 이삼성 원로 목사는 교회 안에 유치원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교회가 유치원을 운영한다는 게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였다. 1993년 3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건영 목사 역시 지역사회 섬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예수님은 영혼도 구원했지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먼 ▲인천제2교회 이건영 목사ⓒ데일리굿뉴스 저 손 내밀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도 영혼구원과 함께 지역 내에서 아픔 있는 주민들을 위해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회가 이처럼 다양한 섬김을 펼치게 된 데에는 지역적 특징도 한 몫 한다. 신도시에 밀려나 3D업종 공장들이 교회 주변에 있다 보니 교회 인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다수다. 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복지시설이나 의료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 교회가 이들을 위한 섬김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 교회가 예배당을 세우면서 생길 법한 주민들과의 갈등도 없었다고 한다. 4300여 평에 달하는 예배당 공사가 진행되는 약 2년 동안 인근 공구상가단지와 학교 관계자, 주민들은 단 한 차례 반대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학교 옆에서 건축하는 것은 죽음이죠. 그런데 단 한 번도 주민들이 민원을 넣거나 시위를 한 적이 없었어요. 기적 같은 일이죠. 그 동안 교회가 주민들과 함께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주민들에게 교회의 신뢰가 형성된 것 같아요. 새롭게 만든 주차장도 주민들과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이건영 목사는 교회 사역에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 "지역사회와 나눌 수 있는 사역은 주변에 늘 있다"며 "목회자와 성도들이 '거룩한 소비, 성경적인 소비'라는 마음으로 사역에 임한다면 지역과 하나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정 기자2017-06-23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는 유머와 재치로 말씀을 풀어내는 목회자로 유명하다. 포도원교회도 그가 부임한 이후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부산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대형교회로 자리매김했다. 김 목사를 만나 포도원교회가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 사연을 직접 들어봤다. 재치 있는 입담, 구수한 사투리…'신선한 바람' 일으켜 흔히 포도원교회의 성장 비결을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김문훈 목사의 설교'를 이야기한다. 설교라면 지루하고 딱딱하기 마련인데, 김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내용에 구수한 사투리가 더해져 '재미있다'는 것. "많은 현대인들이 생활에 지쳐 있는데 교회가 이들을 위로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설교를 좀 더 흥겹게, 신나게 하다 보니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던 한과 아픔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요. 제 설교 듣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IMF 이후 한국사회가 침체 속에 빠져있던 때 재치 있는 김 목사의 설교는 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웃기면서도 성경의 핵심내용이 담겨져 있어 많은 성도들이 좋아해 준 것 같습니다. IMF 영향으로 사회가 우울했던 시기였기에 더 성도들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포도원교회는 구제와 전도에도 힘쓰고 있다. 매주 특별강사를 초청해 찬양콘서트와 건강세미나, 간증집회 등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농어촌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농어촌교회 80여 곳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80개의 전도팀이 부산 전 지역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도팀원들은 모두 제자훈련을 받고 매주 거리에 나가 대상에 맞는 전도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탁월한 전도활동으로 1년에 새신자가 3000명에 이릅니다." 김문훈 목사는 포도원교회를 일명 '포도당교회'라고 소개한다. 여기에는 성도들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전해주는 교회가 되고 싶단 바람이 담겨 있다. "포도원교회에 오는 모든 성도들이 위로를 얻어 얼굴에 생기와 소망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부산 지역을 대표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며 노력하겠습니다."

김준수 기자2017-06-09

북한 노동당 간부였던 남명혜 대표가 우리나라에 정착한 지 올해로 9년. 탈북 직후 중국에서 밀고 당해 북송됐던 그는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현재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에서 탈북민들의 자립을 돕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민들이 올바른 신앙 안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돼주고 싶다는 남 대표를 만났다. "정성스레 키운 토종닭으로 탈북민 자립 도와요" 올해로 탈북 9년 차인 남명혜 대표는 탈북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2015년 9월 'Jesus Power System'(이하 JPS)을 설립했다. 북한에서 17년간 총괄수출입과장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토종닭과 기러기 등 가금류와 포도 효소, 된장ㆍ고추장 같은 발효식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노동당 간부였던 남 대표가 탈북까지 하게 된 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불경한 언급' 때문이었다. 함께 일하는 당 간부에게 지나가듯 건넸던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중에 역사는 김정일 장군님을 용서할까요?"란 한 마디에 정치범으로 몰려 쫓기듯 두만강을 넘어야 했다. 사선을 넘어 가까스로 도착한 중국에서도 고난은 계속됐다. 몸을 숨기고 있었던 조선족 집에서 남 대표를 밀고한 것. 탈북할 때 챙겨온 달러가 화근이었다. 다시 북송됐지만 경계가 느슨했던 때를 노려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북송돼서 감옥에 갇혀 있는데, 정치범으로 발각될까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때가 마침 주일을 앞둔 날이었는데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죠. 그저 이 고난이 지나가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남 대표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한국에서 폴리텍대학을 다니는 등 발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북한에 남아있던 딸도 2012년 내려왔다.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탈북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힘썼다. 하지만 전도를 하면서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탈북민의 현실을 목격하게 됐다. 휴대폰 요금을 낼 돈이 없어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탈북민들을 보며, '이들을 도와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 "통일부 산하에만 탈북민 단체가 70개가 넘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뿌리 내리지 못한 탈북민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로 나가고 있는 형편이죠. 탈북민들을 평화통일의 역군으로 키워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일자리와 보금자리가 시급해요." 토종닭 100마리로 시작한 양계장은 1년이 지난 지금 1만 마리에 육박해 본격적인 유정란 판매도 준비하고 있다. 가로 0.5m, 세로 0.5m 크기 철창에 암탉 6마리를 사육하는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 방식이 아닌, 산이나 들에서 마음껏 뛰노는 자연방사 양계를 실천하고 있다. 항생물질이 들어간 사료 대신에 발효 효소와 갈은 조개 껍질을 섞은 사료를 쓰고 있다. 현재 29명의 탈북민과 함께 일하고 있는 남 대표는 8월말까지 고용 인원을 대폭 늘릴 계획이다. 남 대표는 "한반도의 평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탈북민을 통일의 마중물로 키워야 한다"며 "한국교회가 탈북민 지원에 앞장서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은정 기자2017-05-29

만성신부전증으로 여러 번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던 신준식 목사(열방을 섬기는 교회). 오랜 투병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전심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매일 아침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하던 신 목사는 기적처럼 신장을 이식 받게 됐다. 수술 후 신 목사는 삶의 모토가 달라졌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장 8절의 말씀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다. 주님께 빚진 은혜를 열심히 갚아나가고 있는 신 목사를 만났다. 신장 투석 중 기적처럼 뇌사 어린이 신장 이식 받아 만성신부전증을 겪으며 오랜 투병 기간 동안 수 차례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신준식 목사는, 2009년 결국 투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치닫게 됐다. 투석을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때로는 죽음이란 두려움에 낙심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을 경험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신 목사에게 '전심으로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주셨다. 기도 끝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그를 기다렸다. "몸의 상태는 정말 전심으로 기도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쇠약해졌어요. 하지만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늘 예배당에 올라가 기도했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지 딱 6개월이 되던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2014년 3월 29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기기증센터에서 제 몸과 부합하는 신장이 있어 이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화가 온 거죠." 전화를 받고 바로 병원에 입원한 신 목사는 11시간의 대수술 끝에 새로운 신장을 이식 받을 수 있게 됐다. 신 목사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준 사람은 바로 한 살 밖에 안 된뇌사 어린이. 어린 아이의 신장을 이식 받아 수술 후에도 재활 치료 기간은 오래 걸렸지만 3년이 흐른 지금 신 목사는 이전보다 더 가볍고 밝은 표정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신 목사의 삶은 바뀌었다.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10장 8절'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가 삶의 모토가 된 것. ▲열방을 섬기는 교회 신준식 목사ⓒ데일리굿뉴스 "삶의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경험했어요. 때문에 저의 맘 속에는 오랫동안 빚진 자의 마음이 있었죠. 그래서 투병 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사역을 조금씩 해 왔는데 신장 이식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매주 월요일 지역 어르신께 '국수 대접' 현재 신 목사는 매주 월요일 오전 지역 어르신들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어르신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점심 식사를 제공한 지 벌써 1년. 어느새 교회는 지역 어르신들의 만남 장소와 쉼터가 됐다. 한금순 어르신(88)은 "매주 월요일이면 교회에 와서 동네 친구들하고 다 같이 국수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며 "집에 혼자 있으면 안 먹었을 텐데 이 곳에서 다 함께 밥을 먹으니 항상 월요일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신 목사는 이 외에도 지역 아동들과 가정회복을 위해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연세지역아동센터'와 함께 상담 및 학습교육을 지도하고 있으며, '엄마다운 엄마, 아빠다운 아빠'를 양성하고자 '페어런트 후드' 세미나도 진행하고 있다. 신 목사는 끝으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살라고 주신 이 생명, 제가 갖고 있는 모든 달란트를 통해 일평생 하나님 사역에 쓰고 싶다"고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홍의현 기자2017-05-28

2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가 친환경 농작물을 접하면서 건강을 회복한 목회자가 있다. 바로 충남 예산 광시송림교회 이상진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건강을 회복한 후 15년간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지어온 광시송림교회와 이상진 목사는 얼마 전 2017 녹색교회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광시송림교회 이상진 목사를 직접 만나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연과 친환경 농법의 중요성, 그리고 앞으로의 목회 계획을 들어봤다. 2개월 시한부 판정…'친환경 농작물'로 건강 회복 20년 전 충남 예산의 작은 시골마을에 위치한 광시송림교회로 부임한 이상진 목사. 첫 목회지인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사역했던 그는 5년 만에 '당뇨 합병증'으로 2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먹지 말아야 할 인스턴트 음식들을 즐겨 먹었던 게 화근이었어요.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은 물론, 입 안이 모두 헐고 잇몸이 주저 앉아 죽 한 그릇 먹기도 힘들었죠. 그러던 중 '자연 친화적인 음식'을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게 자연 친화적 음식을 접하게 된 이상진 목사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은혜를 누리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깨닫게 됐다. 이 목사는 곧바로 목회 방향을 '녹색-생명교회'로 정하고 친환경적인 농법을 연구했다. "비료나 제초제, 고엽제 같은 화학 제품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이 모두 손가락질했어요. '죽다 살아나더니 목사가 미쳤다'고 했죠. 하지만 친환경 농작물을 먹으면서 건강 회복을 경험했던 저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교회 성도들부터 협력해 나가면서 점차 사역을 넓혀나갔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일까. 이상진 목사의 사역은 점차 지역 주민들의 공감을 얻게 됐고, 현재는 마을 전체가 '생태 환경 농업 지역'으로 지정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목사는 친환경적으로 '오디', '꾸지뽕', '양파' 등의 농작물을 음료로 가공해 수익을 내고 있다. "처음 친환경 농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과 약속했어요. 절대로 자연과 생명을 헤치는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말이죠. 가공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금은 제 사례비로 쓰이고 있어요. 시골교회이다 보니 목회자 사례비 부담이 크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사실상 저는 '자비량 사역'을 하는 셈이죠." "교회는 지역 공동체…농촌교회 목사는 농부로 살아야" 이른바 녹색교회를 이루면서 교우들의 관계도 좋아졌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교회 안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모두 친환경 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이뤄진 감사의 열매다. "우리 교회는 목사가 따로 심방을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 속에서 매일 성도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살아가기 때문이죠. 목사는 성도와 일심동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웃을 때 함께 웃고, 울 때 함께 울어주는 것. 또 그들의 고민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목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목사와 광시송림교회는 주변 농촌교회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타 지역 목회자에게 친환경 농법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이 목사는 '광시송림교회의 특별한 사역이 농촌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에 작게 나마 도움을 주고 있다'고 자평했다. "박사들이 모인 도시교회의 담임목사가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것처럼 농촌교회 목사들은 농부가 돼야죠. 하지만 많은 농촌교회 목회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저는 그저 '농부가 되라'는 조언만 해줄 뿐이에요. 건물 뿐인 교회를 만들지 말고 공동체인 교회를 만드는 게 진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목회 계획을 묻는 말에 이상진 목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동네 이장이 돼 보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남은 목회 기간 동안 '친환경 농법 사역'을 더 넓게 전파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지금까지는 교회에서만 이 농법을 전해왔는데 이제는 타 지역 주민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자연스레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고 복음의 참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사역이죠. 먼 훗날 은퇴 목회자가 됐을 때는 평생 순박하게 농촌목회를 해온 목사님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고 싶어요. 작은 목회자 공동체를 만드는 게 저의 마지막 꿈이죠."

윤인경 기자2017-05-26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직후부터 약 두 달간 천안함 브리핑을 맡았던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우리나라의 영해를 지키는 수장으로서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전 사령관은 "그 때마다 조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한다. 40년 군생활 동안 맞닥뜨려야 했던 말 못할 어려움 속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 2~3시간 자고 컵라면으로 끼니…교회 갈 시간도 없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 전 사령관은 진해에 있는 '다락방'에서 믿음을 키웠다. '다락방'은 임관한 장교들끼리 함께 숙식하며 예배와 기도를 했던 조그마한 방이다. 믿음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다락방에서의 신앙훈련은 이후 닥치게 되는 사건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버팀목이 돼줬다. 천안함 폭침 당시 이른바 천안함 괴담으로 온 사회가 들썩거렸다. 좌초설, 미군 잠수한 충돌설부터 심지어 자작극이라는 말까지 오르내렸다. 왜 침몰한 것인지 그 원인이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국민들은 정부가 뭔가 숨기는 것 아니냐는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결과가 밝혀지기까지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며 "가짜뉴스와 괴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정부가 거짓말하며 진실을 숨긴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 사령관은 두 달간 브리핑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끼니는 대부분 컵라면으로 때우고 잠도 책상에 엎드려 2~3시간 잔 것이 다였다. 그는 40년의 군 생활 중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시간조차 없던 그 때,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릴 곳은 하나님 뿐이었다. 사건 한달 반이 지나서야 결정적인 증거인 북한의 어뢰 조각이 발견됐다. 한국, 미국, 스웨덴 등 5개국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 조사단이 파견돼 북한의 소행인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 전 사령관은 "지금도 평택에 전시돼 있는 천안함을 볼 때마다 가슴이 매우 아프다"며 "천안함 용사 46명은 전사했지만, 그들은 국민들에게 올바른 안보관을 심어줬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작전실패' 될 뻔한 최대 고비…"할 수 있는 건 기도 뿐" 이 전 사령관이 겪은 군 생활의 고비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2004년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로 군수물자를 보냈을 때, 그가 수송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때 작전실패가 될 뻔한 위험천만한 위기를 만났다. 그는 "당시 부산에서 쿠웨이트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는데, 도중 엔진이 고장 나 가지고 있는 연료로는 도저히 쿠웨이트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작전 실패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전부 초비상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참수당하는 등 테러 위협이 높아서 상황은 더 안 좋았다. 테러를 당하거나 배가 해적들에게 납치를 당하는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미국 유조선과 연락이 닿아 연료를 보충받기로 했지만 일은 그렇게 술술 풀리지 않았다. 이 전 사령관은 "인도양에서 미군 유조선과 만나 기름을 받기로 했는데 파도가 3~4미터에 이르는 등 기상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며 "결국 미국 유조선이 이런 상황에서는 기름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보냈을 때는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망망대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기도밖에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모아 함장실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파도를 잠잠케 해주십시오.' 낮 1시쯤 됐을까. 갑자기 파도가 잠잠해졌다. 미군 유조선과 만나기로 한 시각은 낮 2시였다. 그는 "미군 측에서 기름을 줄 수 있다는 통보가 왔고, 2시에 목표지점에서 무사히 기름을 받을 수 있었다"며 "대원들이 하나같이 다 기적이라고, 기도 덕분이라고 감격해하더라"고 말했다. 이 전 사령관은 군 생활에 고비가 닥칠 때마다 '저로 인해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 때문일까. 그는 40년간 국방안보의 최일선에서 근무를 마치고 명예스러운 전역을 했다. 그는 이제 다음 세대 해군들을 위해 힘을 쏟을 계획이다. 이 전 사령관의 보다 자세한 신앙 간증은 본지 제휴 <신앙계> 6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인경 기자2017-05-18

7살에 한센병에 걸려 사람들의 조롱과 편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김흥수 장로(원당반석교회). 여러 차례 죽음을 시도했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던 그에게 누나가 내민 성경책 한 권은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소록도로 들어가 하루하루 기도와 찬양으로 살던 어느 날, 기적처럼 한센병이 나았다. 후유증으로 인해 지체장애인으로 살고 있지만, 김 장로는 자신의 삶이 '덤'이라 감사할 따름이라고 주저 없이 고백한다. 신앙계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공모한 '간증수기'에 입상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만나보자. '하늘이 내리는 큰 벌, 천형(天形)'으로 알려진 한센병. 김흥수 장로는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도 격리된 채 살았다. 그는 골방에서 밥도 따로, 잠도 따로, 화장실도 따로 써야 했다. 손과 발은 변형되고 눈썹도 모조리 빠졌다. 한번은 상처 붕대를 끌러보니 벌레가 한 주먹이나 나왔다. 김 장로는 벌레가 병 때문에 자신의 몸 속에서 나온 줄 알고 깜짝 놀라, 몰래 땅 속에 묻었다며 그 때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마을에서는 사람만 모이면 한센병에 걸린 내 얘기로 온통 수근거렸다"며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린 나이임에도 도저히 이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약을 먹어도 보고 목을 매어도 봤지만 죽는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가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누나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전해줬다. 방에서 하는 일이 없으니 밥 먹듯이 복음서를 읽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한센병 환자를 고치셨다고 적혀있었다. 김 장로는 "성경에는 한센병이 치유된 기적이 68번이나 기록돼 있다"며 "그 때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이 내 병도 고쳐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살 수 있겠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19살 되던 해에 그는 한센병 약이 풍부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록도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대전에서 소록도까지 간 길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과 같은 '고행길'이었다. 그가 버스 뒷자석에 타자 승객 중 누군가가 왜 한센인을 태웠냐며 고함을 쳐서, 결국 그는 버스 조수에게 끌려 차 밖으로 내팽개쳐지기도 했다. 겨우 도착한 소록도는 낙원 같았다. 그는 소록도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하나님께 매달리고 찬양했다. 김 장로는 "그 때는 정말 일주일에 11번도 더 교회에 갔다. 오직 신앙만이 내가 사는 이유이자 힘이었다. 피곤해서 새벽 찬양대에 빠지면 하루 종일 괴로워 교회 찬양대석에서 자고 찬양을 한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성경을 읽을 때 가졌던 소망은 20년도 더 지나서야 마침내 현실이 됐다. 한센병이 다 나은 것이다. 그는 10년 만에 아내와 함께 소록도를 나와 경남 함안군에 정착했다. 김 장로는 교회 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김 장로는 불교를 믿으며 평생 살아온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40여년 간 매일 새벽기도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암으로 입원 중인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덮쳐왔다. "전도할 기회는 이 때가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아버지, 예수 믿으세요.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미국대통령도 그 사람들이 다 바보라 예수 믿습니까?'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며 '나 예수 반대 안 한다'고 말하셨죠." 아버지의 진료차트를 보니 기독교라고 적혀 있었다. 김 장로는 아버지 마음이 변한 것을 알게 됐다. 목사님을 불러 세례를 받을 것을 권했고, 아버지는 병상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그 날 돌아가셨다. 이제 한센병은 다 나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인해 김흥수 장로는 지체 2급 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담담히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치료해주셨기에 지금 내 삶은 덤으로 받은 것이다. 부족한 모습이지만 주님께 쓰임 받는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감사하다"

김민정 기자2017-05-16

한국교회의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본질 회복이 우선이라 외치지만,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풀어가기가 쉽지 않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청년들이 빠져나가고, 고령화되는 교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권준 목사는 '기성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는 비전을 품었다. 그리고 미국 시애틀의 형제교회로 갔다. 올해로 부임 17년째, 권 목사의 눈에 '양로원' 같았던 형제교회는 활기가 넘치는 교회로 변화됐다. 성도들도 꾸준히 늘어나 시애틀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10년 전부터는 컨퍼런스를 통해 지역교회들과 함께 건강한 교회(웰빙처치)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권준 목사를 만나, 형제교회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봤다. "교회는 사랑의 힘에 의해서 변화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던 권준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고 부목사로 목회하다가 1996년 귀국해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했다. 두란노서원 원목으로 섬기며 해외 한인교회들을 많이 접해봤다는 그는 침체된 기성교회의 부흥을 향한 비전을 품게 됐다. "기성교회들이 처음엔 부흥하다가 청년들이 빠져나가고 고령화 되면서 침체되잖아요. 이러다가는 교회가 장례식을 치르게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기성교회도 변화돼서 부흥할 수 있다는 열정이 생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회를 달라고. 변화의 모델을 만들어서 수많은 교회들과 비전을 나누고 싶다고요." 그리고 2000년 권 목사는 시애틀 형제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장년 200여 명이 출석하는 작지 않은 규모의 한인교회였지만, 권 목사의 눈에는 '양로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부임하고 4주째 되는 주일이었어요. 예배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하는데, 권사님 한 분을 꼭 안아드렸습니다. 그분이 너무 사랑스러웠거든요. 그리고 말했죠. '권사님 사랑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이게 바로 목회야'라고."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을 한 것도 아닌데, 성도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가정 올까 말까 했는데 한 주에 몇 가정씩 새신자로 함께하니, 성도들도 신이 났다. 목사와 성도들 사이의 믿음이 쌓이고, 교회 분위기가 활기차게 변하고 있었다. 형제교회는 현재 3000명 이상이 출석하는, 시애틀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하지만 권 목사는 성도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뭔지 알게 됐다. '교회는 사랑의 힘에 의해서 변화된다.' 형제교회에서 17년 목회하며 깨달은 것이다. 목적이 우리를 이끄는 게 아니라, 사랑의 힘이 목적을 향해 함께 가게 한다는 것. 그게 형제교회의 오늘을 있게 했다고 권 목사는 이야기한다. ▲컨퍼런스에는 목회자뿐 아니라 교역자와 성도들 모두 참여할 수 있다ⓒ사진제공 권준 목사 '예배ㆍ친교ㆍ전도', 세 가지 원리에 집중해야 권 목사는 자신이 처음 품었던 비전대로 형제교회의 부흥을 다른 교회들과 나누기 위해 2007년부터 해마다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컨퍼런스에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참석할 수 있게 했다. 함께 변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015년에는 중국동포 목회자 80여 명과 함께 제주도에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올해는 5월 22~24일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동수원장로교회에서 '세상을 감동시키는 교회'라는 주제로 진행할 예정이다. 권 목사 외에도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김상현 목사(동수원장로교회), 우상진 목사(성경과 설교연구원장) 등이 강사로 참여한다. "컨퍼런스에서 중요하게 나누는 이야기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집니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새 계명이라 함은 예수님이 제자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예배죠. 두 번째가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즉 친교입니다. 세 번째는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바로 전도죠." 권 목사는 교회가 이 세 가지 원리에 집중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의 가장 큰 힘은 예배의 갱신에서 오고, 예배로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그게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몰려오며 전도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슬로건은 '아이엠 교회'입니다. 'I'm missionary'의 약자죠.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선교사라는 자각을 갖고, 배려와 양보와 섬김을 실천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정문에는 '당신은 지금 선교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있답니다."

박은정 기자2017-05-15

평택의 작은 농촌마을에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노인과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일명 '노아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임천명 목사가 마련한 것이다. 임 목사는 "성경 속 노아의 가족처럼 농촌 지역의 소외계층이 '노아방주 복지센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길 바란다"고 고백했다. 조손가정 위한 '지역아동센터' 사역에서 시작 13일 오전 평택시 팽성읍 노성리에 위치한 섬기는 지역아동센터(센터장 임천명 목사)에서 '노아방주 건축기금마련 음악회'가 열렸다. 이날 음악회에는 지역 내 어르신과 아이들, 그리고 지역아동센터의 후원자들이 함께 해 자리를 빛냈다. 섬기는 지역아동센터가 위치한 평택시 팽성읍 노성리는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 농촌 지역이다. 그나마 젊은 층이라고 해도 어르신들의 자녀 혹은 손자·손녀 몇 명뿐으로, 마을 대다수가 조손가정, 편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으로 구성돼 있다. 이런 가운데 임천명 목사와 그의 아내 노영순 사모는 17년 전 이 곳으로 이사 와 교회를 개척하고 푸드뱅크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임 부부는 봉사를 하며 지역 내에 방치된 아이들을 발견하게 됐다. "17년 전 이 마을에 이사오면서 푸드뱅크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섬기는 교회 임천명 목사 주로 계양 지역의 독거노인과 저소득층 가정에 식료품을 나눠주면서 많은 가정들을 만나게 됐죠. 그런데 한 집 한 집 방문을 하면서 조부모 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아이들을 위한 센터를 운영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기에 제대로 된 장소도, 비용도 없었다. 그러던 때 마침, 주변의 도움을 받아 교회 인근에 작은 공부방을 열게 됐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 목사 부부가 자원봉사를 하던 평택 푸드뱅크에서 간식을 받아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에서 책을 기증받으며 아이들을 돌봤다. 차츰 사역이 넓혀지면서 임 목사 부부는 2002년 10월부터 섬기는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게 됐다. 현재는 23명의 아이들을 섬기고 있으며 학습지도와 역사논술, 안전교육, 아동권리교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 정서지원 상담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있다. 학교를 마치면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집에만 있었던 아이들이 이제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센터로 달려온다. 자연스럽게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된 아이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아이들 대다수가 자신감도 없고 가정에 대한 상처도 많이 받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센터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며 교육도 받으면서 점점 회복되더라고요. 학교에서 반장은 물론 회장까지 맡는 아이들도 있어요. 아이들이 변하자 가정까지 함께 전도되는 기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손자·손녀 모두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는 이운하 할머니는 "우리 손자·손녀가 '학교 대신 교회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교회를 너무 좋아한다"며 "이제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많이 밝아져 목사님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성경 속 노아처럼 '노아방주'에서 구원 받길" 이런 가운데 임 목사 부부는 이제 노인과 아동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노아방주 복지센터'를 설립하고자 한다. "노인들은 나이가 들거나 치매에 걸리면 지병으로 인해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손자들과 한 공간에서 지낸다면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삶의 희망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이들도 노인들과 함께 지내며 노인공경도 배우고 저절로 따뜻한 보살핌도 받을 수 있어 더 좋은 거죠." 임 목사 부부의 최종 꿈은 성경 속 노아의 가족처럼 노아방주 복지센터에 머무르는 노인과 아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섬기는 교회는 농촌의 작은 교회고 성도들도 많진 않지만 복지 목회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구원하고 싶어요. 그래서 갈급한 마음을 가진 소외계층 영혼들이 '노아방주 복지센터'에 생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길 바랍니다." 한편 노아방주 복지센터 기금 후원과 관련된사항은 노영순 사모(010-3376-1191) 문의 및 (사)함께하는 다문화네트워크 351-0943-4390-13(농협)을 통해 가능하다.

한연희 기자2017-05-10

"한경직 목사님은 은퇴 후 남한산성의 조그만 집에서 26년간 사셨는데, 1년에 몇 번씩 찾아뵈며 가르침을 받았더랬죠. 늘 다독여 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적 유산을 충분히 물려받았다고 봅니다." 한국교회 원로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의 말이다.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앙으로 한국교회와 사회에 본이 됐던 신앙의 선배들이 그리워지는 이때, 김 목사를 만나 이 시대의 '스승'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유창한 설교, 심오한 신학보다 중요한 건… 1천만 명 가까운 성도수로 국내 최대 종교가 됐지만, 사회 신뢰도에서는 타종교보다 월등히 낮은 점수를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역설적 상황.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배들이 남긴 신앙적 유산을 이어가는 게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김명혁 목사는 이같이 말했다. 김 목사는 "그저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을 조금만 닮으면 된다"면서 "모두를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섬김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설교를 유창하게 하고,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오히려 그것들이 복음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교회가 권력과 외형에 치우치는 일을 멈추고 기독교 본래의 가치인 섬김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설교 전에 삶이 우선시 돼야한다"라며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면 교회에 반대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에 섬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분과 그 교회가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 있어서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다"면서 "존경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타 종교까지도 퍼져 있다. 지금도 다른 종교 지도자가 한 목사님의 섬김을 칭송한다"고 말했다. 그의 삶에서 참된 스승은 멀리 있지 않았다. 한경직, 정진경 목사와 같은 유명한 인물의 가르침도 있었지만 주일학교 교사의 헌신은 평생의 신앙적 토대가 됐다. 김 목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옥살이 중이었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보살핌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평양 서문밖교회 이인복, 최병목, 명선성 선생님이다. 아직까지 이름도 못 잊을 정도다. 새벽기도와 주일성수, 순교신앙을 가슴깊이 심어주신 분들”이라고 밝혔다. "새대통령, 섬김의 정치 해달라"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새로운 대통령에게도 한국교회 신앙적 스승과 같은 섬김의 리더십을 주문했다. 김 목사는 "독재와 독선의 정치를 포기하고 백성들을 위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면서 "낙선자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가난한 자들을 섬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헌신하셨음에도 나중에 하나님을 믿고는 민족주의를 버리셨다"면서 "지역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통합의 정치를 해달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삶으로 섬김의 족적을 남기는 진정한 스승이 간절히 필요한 이 시대다. 한국교회가 먼저 그 역할을 감당해 사회에 제시한다면 땅에 떨어진 신뢰는 저절로 회복될 것이 자명하다. 그럴 때 비로소 국내 1위 종교로써의 면모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런 고민은 김명혁 목사가 한국교회에 지속해서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김민정 기자2017-05-02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가정과 교회, 학교의 연계 회복 사역을 펼치고 있는 이명현 선교사.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조금씩 변화되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 아이들을 통해 달라지는 가정과 학교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본다. 이 선교사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이들을 불쌍하게 보지 말아주길 거듭 당부했다. 아이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바라보고, 이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 그는 "내가 언제 이곳을 떠나더라도, 이들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유일한 목표"라고 담담하게 고백했다. "몽골 떠나야 했을 때 많이 힘들어" 이명현 선교사의 첫 사역지는 몽골의 작은 도시 종머드였다. 2004년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이곳에 발을 디딘 그는 어린이들의 회복 사역에 주력했다. "몽골이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하면서 길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아졌어요.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아이들을 지원해 주면서 그 부모와 가정을 회복시켜야겠구나 마음 먹었죠." 전문기관과 협력해 부모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어린이전도협회 등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잠재력을 개발하는 사역들을 했다. 그렇게 6년을 지내면서 지역의 가정들이 하나씩 회복되는 모습에 감사했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몽골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몽골에서 비자법이 만들어지면서 사역이 좀 힘들어졌어요. 종교활동을 제재하고, 법을 위반하면 무조건 추방됐죠. 저는 NGO 비자로 들어왔는데, 종교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돼서 나오게 됐어요. 단 일주일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나와야 했죠. 많이 힘들었어요. 왜 나일까…. 처음엔 이해가 안됐어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 확신했고,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해왔기에 너무나 아프고 괴로웠다는 이 선교사. 기도하던 중 '이것도 복이 되게 해주겠다'는 말씀을 받고 순종하기로 했다. 2010년 우간다에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간다의 쿠미 지역에 도착해 그가 눈여겨 본 것은 교육제도였다. 이 선교사에 따르면, 학교에 대한 정부 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 초등학생 33% 정도만이 졸업을 한다. 학교 수업에 흥미를 못 느끼고 나온 남자아이들은 취업, 여자아이들은 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5% 정도라고. "공립학교를 지원하는 센터(쿠미CDP)를 설립해서, 어린이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일을 시작했어요. 학부모들은 급식비를 내도록 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시설을 지원해요. 교사숙소, 교실, 교문과 울타리, 각종 교육 기자재 등이죠.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의식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면서 다양한 방과후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쿠미CDP가 지원한 지역의 공립학교는 총 23곳이다. 학교 지원에 있어서 급식 프로그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고,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해 유급률을 줄일 수 있게 되기 때문. 센터가 지원하는 학교들은 학기가 시작되면 급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정기적인 평가회의를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안들을 나누고 실행한다. 초등학교 졸업국가고시 1등급 아동들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한국을 잠시 찾은 이명현 선교사는 아프리카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데일리굿뉴스 센터 사역에 몸 10개라도 모자라…아이들 보며 힘내 이 선교사의 사역은 학교, 어린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쿠미CDP는 가정-교회-학교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단계별로 해결하는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다. 가정의 경우 열악한 주택환경, 부모 역할에 대한 책임감 부족이 가장 큰 문제다. 이를 위해 학부모들이 가정의 소득증대를 위해 소규모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마을저축조합을 운영해 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한다. 모델홈 프로젝트를 통해 주택환경을 단계별로 개선한다. 부모들의 의식계몽을 위해 농업박람회를 열고, 견학과 세미나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교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선교사는 "우간다 인구의 70%가 기독교인이지만, 토속신앙과 결합된 형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성경이 없는 신자들이 많다"며 "교회는 많지만, 정작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술사를 찾아가는 게 이곳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목회자 재교육도 하고 있다. 또한 교회연합회를 구성해 교회들이 주체적으로 사역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밖에 교회건축 지원, 리더와 교사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현재 이 선교사가 진두지휘하는 쿠미CDP는 총 3곳이다. 때문에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들이, 학교가, 교회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힘을 내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아프리카 아이들 하면 못 먹어서 비쩍 마른 모습을 떠올리게 되잖아요. 전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이들을 불쌍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가능성, 희망을 바라보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래서 학교지원 사역이 중요하죠. 동정심에 일시적으로 돕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 이들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 돼야죠." 이 선교사는 '늘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갑작스럽게 몽골을 떠나야 했던 기억이 있기에, 언제 어느 때라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사역 원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건, 이 땅에 영적, 육체적 굶주림이 종식될 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요. 그 비전만 바라보고 갈 겁니다." ▲이명현 선교사는 바쁜 사역에 힘이 들 때도 있지만, 변화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기운을 낸다고 이야기한다ⓒ이명현 선교사 제공

prev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goodtvICGCCMLOVE굿피플KCMUSA기독뉴스GoodPeople아멘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