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훈 교수2017-02-21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안보와 일자리를 강조하는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강대국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주창한다.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로 나서면서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도 군사적 갈등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경제도 안보도 확보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이 틀림없다. 시인 고은이 언젠가 문학 행사에 초청받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갔나보다. '리스본 이후'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먼 낯선 곳에서조차 군사적 불안을 걱정해야만 하는 슬픈 분단국 국민의 운명을 한탄했다. "파두의 밤길이었습니다/ 돌아온 호텔 객실 TV/ CNN도 BBC도/ 온통 북한 핵문제였습니다/ 여기까지/ 여기 이베리아 반도까지/ 십년 뒤에도 물고 늘어질/ 나의 운명 한반도의 난제가 와 있습니다/ 끌끌 혀를 찬다고 될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아, 언제나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음식타령이나 하고 날씨타령이나 하고 축구타령이나 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하며, 평화를 위한 통일이어야 한다. 평화 없는 통일이라면 비록 통일국가를 이루었더라도 다시 갈등과 분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은 평화로워야 하며, 통일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통일기도회는 곧 평화기도회여야 한다. 우리사회는 지금 폭력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 구조적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갑질을 경험하고 있다. 경쟁이 일상화되면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고, 언어는 거칠고 행동은 파괴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주차시비나 아파트 층간 소음 갈등은 끔찍한 살인으로 비화되곤 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내는 것조차 살인이라 하셨고, 정당한 복수조차 포기하라고 요구하셨다. 분노는 내면의 평화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예수님은 분노만 아니라 멸시와 경멸, 혐오의 언어도 비판하셨다. 괴뢰, 종북좌빨, 수구골통, 전부 다 경멸과 혐오의 언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다.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나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교회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평화운동은 일상생활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노력이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작은 실천이고, 요란한 구호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우선 마음의 평정을 힘써야 한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공격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남한이 사드를 배치하려는 것도 다 내면의 불안 때문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참 평화란 정의로움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불의에 기초한 평화는 강요된 질서, 곧 거짓평화다. 불의한 사회구조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가져다 주고, 그 절망감은 평화를 해치는 분노와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통일을 기도하는 교회는 평화를 구하는 교회이며, 평화의 교회는 각 개인의 내면의 평화로움을 가져다 주며, 사회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교회다.

이민규 교수2017-02-17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내적 치유, 재정적 번영과 영적 권능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혹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주님을 경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통해 잘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앞섰던 것은 아닐까요? 잘되고 싶은 것이야 인간의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나 늘 변하고 사라지는 변덕을 부리면서 행복을 보장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들에 속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 권력, 사람들의 인정, 성공, 쾌락 등이 그런 것이지요. 이런 것들에 빠지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주인 노릇을 하기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을 공간이란 실제로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에 빠진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섬긴다고 말은 하지요. 겉으로야 경건할지는 몰라도 그들의 삶은 위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필자는 오늘날 기독교가 상업화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고백하는 많은 기독교인도 이해관계가 걸리면 마음 속의 숨은 동기를 드러냅니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막상 돈과 명예와 권력이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목회자들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목회가 정치적이고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봅니다. 기독교 출판사도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는 책보다, 회사에 돈벌이가 될 책에 우선권을 두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선임을 강조하지만, 신앙과 성공을 모두 가지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봅니다.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복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변하면 안 됩니다. 유대 신비주의자 헤쉘은 성경에 관해 “(고대)그리스인들은 이해하기 위해서 배웠고 (고대)히브리인들은 경외하기 위해 배웠으며 현대인은 사용하기 위해서 배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을 만한 복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행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갈망하던 재정적인 복이나 세상의 성공이 사라져도 “괜찮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궁극적인 복입니다. 이런 신앙을 배우는 것은 기나긴 영적 순례의 여정이 요구됩니다. 부흥회 같은 곳에서 단번에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단숨에 배울 길이란 없습니다. 인생 문제, 신앙문제 한방에 될 수 있다는 약속은 모두 사기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이 길을 가게 되면 말할 수 없이 고되고 수없이 방향을 잃고 넘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강퍅한 심령이 깎여 나가는 아픔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동행하며 손 잡아 주시고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지기에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고 누구에게나 복된 길입니다. 사실, 쉬운 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 길을 가면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배반당하고 심히 고통 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길이 훨씬 쉽고 가벼운 길입니다. 배신도, 뒷탈도 없습니다. 오직 복된 길이니까요.

강성열 교수2017-02-15

작년 12월 9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이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이 권력을 등에 업은 비선실세들의 국정 농단에 휘둘려 왔고, 그 결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한민국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끊고서 정의롭고 건강한 국가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이번 사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로 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되새겨보는 일은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사랑과 약자 보호의 정신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의 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낭독하시면서,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밝히셨다(눅 4:17-19).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다. 그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눅 7:22)이나,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마 25:40)은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병든 자, 갇힌 자 등과 동일시하셨으며(마 25:31-46),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항상 세리들과 죄인들, 창기들, 차별당하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치료해주셨다. 참으로 그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차별 또는 남녀 성별에 의한 차별, 장애의 유무에 따른 차별 등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과 정의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대속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현장에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뜻하기도 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모든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통일한국의 미래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소유욕을 포기하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돕고 의지하는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기심과 탐심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적인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이처럼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온갖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고 한반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는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문형욱 대표2017-02-13

많은 청년들이 이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 참 많은 고민을 한다. 이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신 것처럼 이성에 대해 다름을 인정해야 이성에 대해 이해를 하며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자신이 다름을 인정 받는다는 느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중받고 있다는 마음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먼저 상대방과 내가 다르고, 그 다른 것은 틀림이 아닌 다름이기에 이해할 수 있다는 내면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성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면 이렇게 서로 다른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혹자들은 사람들이 이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가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영향력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물질은 내가 갖고 싶다고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청년들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할 때가 있다. 부디 가슴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특히 형제들 중에는 만남을 하면서부터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자매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자신이 지금까지 벌어온 재정이 많이 없어 지레 겁을 먹고, 자매들에게 “제가 가난한데 그래도 괜찮나요?”라고 묻는 것이다. 자매님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간관계는 감정이 중요한데, 그 감정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현실적 상황을 이야기하면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비전을 위해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지 그 비전에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할 때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성과의 관계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대화임을 알 수 있다.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이성관계에서 대화의 스킬이라는 것은 말을 논리적으로 잘 하고 쉼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따뜻함이 있는 진실된 대화가 중요하다. 자신의 진실을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되 감정을 이해하며 대화할 수 있다면, 상대방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뻔히 거짓인 것이 분명한데 허풍으로 이야기하거나, 지키지 못할 말을 하고 아부하며 입에 발린 이야기만을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은 오히려 닫힐 것이다. 또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집요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성을 힘들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을 학대하거나 타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면, 지금 상대방이 나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좋은 파트너가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은호 목사2017-02-10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이 만들어졌을 때에 그것을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5절)고 공포했습니다. “절일”이란 성일, 종교적으로 기쁜 날이거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절일”이란 “여호와를 위한 축제의 날”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인 아론이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론의 실패는 그가 혼합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여로보암도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왕상 12:33절a).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장막절은 7월 15일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날짜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한 달 후 인 8월 15일로 정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인 아론은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의 절일을 정하고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6절a). 번제란 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번제는 주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할 때 드립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로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때 드립니다. 아론은 지금 금송아지 우상 앞에 단을 만들어 놓고 그 단 위에서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 일입니까? 일찍이 일어나다 그런데 아론이 여호와의 절일로 공포한 바로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6절a)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님들은 이른 새벽 찬물로 목욕재개하고 장독대 앞에 정안수 한 그릇 떠 놓고 신령님께 두 손을 모아 자식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지금도 소원의 성취를 위해 삼천 배를 하며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수행과 기도, 참회를 목적으로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를 하기도 합니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에 해 뜨는 시간부터 해지는 시간까지 한 달 동안 의무적으로 금식을 하고 5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와 성관계도 금지되고 침까지도 삼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단들과 우상숭배자들은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광란의 축제 “이튿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6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어 놀았습니다.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이처럼 먹고 마시며 취하여 일어나 뛰는 행위는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 “뛰놀더라”로 번역된 ‘차하크’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교제나 친교를 말하지만 간혹 “애무하다”, “즐기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므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뛰노는 것은 음란한 성적 추태를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산 아래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고 백성이 방자하게 하여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본 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25절). “방자하니”라는 말이 “키 파루아” 인데 그 원형이 ‘파라’인데 ‘풀다’ ‘해방하다’ ‘고삐를 풀다’ ‘발가벗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NIV성경은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get out of control)로 번역을 했고 KJV은 “벌거벗은”(were naked)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러한 번역들을 보면 금송아지 숭배 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문란하게 광란의 축제를 벌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흥분하여 온통 벌거버숭이가 된 상태로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많은 경우 축제의 이면에는 성적인 타락이 있고 그 배후에는 음란한 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금송아지인가? 하나님인가? 아론은 혼합주의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대세를 못 이겨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다음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의 절일을 정해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며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금송아지 앞에서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론과 그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섬긴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한 것일까요? 이 예배의 대상은 금송아지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실까요? 외견상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절기를 지키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혼합주의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내산 아래 있었던 이 광경은 역사적으로도 계속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도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에봇과 드라빔을 섬기고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섬기기도 했습니다. 에스겔 8장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도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혼합주의 신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탄절 예배에 스님을 초청해 설교를 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토착화를 이야기하면서 성찬식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막걸리를 먹자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아론이 실패한 것은 그가 혼합주의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여호와의 절일을 공포하고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광란의 축제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흥을 즐긴 것입니다. 그들은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긴 것입니다.

신동식 목사2017-02-07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번째 일대일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일명 철봉 놀이터 전투였는데 한방 맞고 코피가 터졌습니다. 당시에는 코피가 나면 지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권투계에서 챔피언까지 했던 저력이 있었지만 한 방에 지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것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의 추억은 쓸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생각도 잊은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독교 서점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그 친구가 책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기독교 서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초등학교를 생각하면 항상 한편에 남아 있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한 순간에 쑥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여기 왜 왔냐고 묻는 것입니다. 책 사러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너는 여기 왜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도 책 사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인이면 으레 하는 질문, "무슨 일하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목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나도 목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서로에게 “너도 목사야”라고 말했습니다. 철봉전투의 승자와 패자가 목사가 돼서 만난 것입니다. 서로에게 “너도 목사야”라는 소리를 들을 때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습니다. 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이 친구가 3대째 모태신앙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3대째 모태신앙의 집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반에 있으면서도 그 친구 집이 3대째 예수를 믿는 가정인지 몰랐고,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제가 그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교회 다니는 것을 서로 알지 못했던 목사의 모습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건을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역사라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봉 전투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앞에 우리의 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다 동일합니다. 역사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파멸의 자리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적인 신앙고백이 얼마나 귀한지를 다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철봉 전투에서 서로의 신앙을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너무나 비약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다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저 친구는 결코 신앙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아마 친구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행동을 해도 된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철봉전투장에는 하나님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주일의 신앙과 월요일의 신앙이 다른 이원론적 모습을 의미합니다. 종종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마도 사회생활에 보탬이 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사회생활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고 단지 개인의 삶과 자녀교육에 조금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오히려 덕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공적인 영역에서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씁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은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적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말씀하시고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를 고백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당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게 살고자 분투할 때 교회가 자랑되어집니다. 공적인 신앙고백이 흔들리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교회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사적인 영역에 묻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공적인 영역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정기 목사2017-02-03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교회다운 교회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세상은 매우 이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요구할 뿐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문화센터를 열고, 선행을 하고, 교회 주차장을 개방하고, 사회봉사를 하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교회가 모두 한다고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쓴 약을 주어야 한다. 저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세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된다는 것을 과거 2000년 인류의 역사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 중심으로 살고,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회개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안으로부터 개혁을 실천해 갈 때, 우리는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있고,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다. 아직 한국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었고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우리에게 교회는 어떤 곳인가? 성경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칭찬받은 교회와 책망 받은 교회가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변질된 교회였고,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에 넘어가 사단이 판치는 교회였고,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병든 교회였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 기관인 교회도 다 거룩하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때 교회는 중세를 어둠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의 역사로 소문난 교회였다. 서머나 교회는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실상은 부요한 교회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비교할 때 역사도 짧고 교인 수도 적았지만 본이 되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성도들이 세웠지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가 되었다. 안디옥교회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이다. 다양한 좋은 일꾼들이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흑인이나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는, 인종을 초월한 교회였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구별하지 않는, 빈부를 초월한 교회였다. 천한 사람이나 귀족을 구별하지 않는, 귀천을 초월한 교회였다(행 13:1). 이처럼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지방색이 있으면 안 된다. 텃세가 있으면 안 된다. 있다면 예수 색깔만 있어야 한다. 섬김만 있어야 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다. 예배가 살아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오직 주를 섬기는 교회였다(행 11:2). 섬긴다는 것은 예배를 말한다. 영어성경을 보면 'worshiping'이라고 번역했다. 예배를 드리며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성령께서 선교의 비전을 주셨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신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배 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다.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다. 그러므로 예배가 축복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다 안디옥 교회의 가장 큰 원동력은 금식과 기도였다(행 11:2-3).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금식하고 기도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크게 부흥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흩어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핍박을 통해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어지게 하신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달랐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시자,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했고 선교사로 파송한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였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사역이었고,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사역이었다. 다시 말해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일어난 역사라면, 13장부터는 사도 바울의 네 차례 걸친 전도 여행으로, 기독교가 세계화가 되는 사역이다. 그 중심에 안디옥 교회가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음성을 듣자마자 순종했다.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보낸다. 이처럼 보내는 것도 선교이고 가는 것도 선교이다.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최고의 명령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한가지를 선택하라. 가든지! 보내든지! 안디옥 교회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면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자.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정재영 교수2017-02-02

정의의 문제 작년 우리 사회는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로 전국민이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이 사태는 결국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안을 국회에서 가결시키는 데까지 이르렀고 앞으로의 정치 일정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역시도 큰 혼란을 경험했다. 위정자들의 권위에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87년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통령지지 모임에 참여해 더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아직도 일치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나 참여의 문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고려돼야 한다. 국정 농단 사태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원칙과 절차를 따르기보다 편법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갑질 논란’ 등 공정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 끊이지 않고 이슈가 되며 우리 사회에 과연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돼 왔다. 이른바 절차상의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 실제적인 민주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표면으로는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듯하지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움직여가는 데에서는 여전히 편법과 부정이 더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우리 사회는 서양에서 30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서서히 경험한 근대화의 변화를 불과 5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를 거쳐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 사회를 지배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정했던 규범도 크게 바뀌게 됐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혼란 가운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규범과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일어나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아직도 전통적인 사고에 이끌리는 우리 사회에서는 불명확한 규정이나 절차의 허점을 노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상황이다. 공공성을 좇는 시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정의의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매우 오래된 주제이다. 신학에서 논의되어 온 정의의 문제는 주로 정의의 개념에 대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정의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롭지 못한 현상들이 빈발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이상일 뿐 현실 상황과 부합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에 이르는 길은 어느 정도의 부정이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어렵다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공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공공성이 무엇인지 몰라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 행위자들 스스로가 예외 없이 강력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통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규범과 제도적 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인들 안에 내재하는 이기심을 억제하고 시민 도덕심으로 결속하도록 하는 규범 말이다. 도덕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돼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소수에 대한 배려와 약자 보호를 기대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등장하고 이윤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행위 동기로서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 특히 경제 발전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곧 미덕이 되어버렸고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서 성공의 사다리에 높이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며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결과에 따라 정당화돼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돼 왔지만, 최근에 사용되는 시민이란 용어는 특정한 부류의 계층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특정한 가치와 행위를 뜻하는 말로 더 자주 사용된다. ‘시민다움’이란 말이 그러한 보기다. 이때 시민은 ‘시민다움’의 가치와 그 가치에 바탕을 둔 시민지향성의 행동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시민이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시민의 모델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착하게 살라는 교훈으로 이야기 되지만,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만 이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하등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당시 사회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웃의 범위를 이방인으로까지 확대하셨다. 그것은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 시민으로서의 책임 우리는 여기서 현대 사회에서 얘기하는 ‘시민’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시민은 결코 약자나 사회 소수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민다움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적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하듯이 바른 ‘시민’의 덕성도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충분히 교육시킨 후에야 사회에 내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으나 충분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수준을 정하기 어려울뿐더러,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의 자리가 교회가 아닌 교회 밖 사회이므로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성경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련돼야 한다. 모든 일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양심에 따라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안내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아야하고, 기독교 시민의식을 갖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돼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양심 있는 시민이 되도록,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정치 문제들에 대해 잘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지하거나 반대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공청회나 지역사회 회의나 의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시민으로서 그들이 관심 갖는 단체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권장돼야 한다. 극심한 격변기를 거치고 있는 이때에 세월호 참사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각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시민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박종운 변호사2017-02-01

2,000년도 초반, 중국동포 여성 한 분께 법률상담을 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고생 고생하여 모은 돈을 남한 친척이 빌려간 후에 나 몰라라 하니, 국가에서 그 돈을 돌려받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민법이 어떻고 형법을 적용하려면 저렇고, 나름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지만, 그 중국동포 분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니, 내 돈인데, 친척이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그 돈 받아서 돌려주면 되는 것이지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그 분과 법률상담을 하면서, 평소에 남한 고객들한테 한 것과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상당히 자본주의화 되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였고 공산당이 하는 일이 법률로 해결되는 것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 분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천천히 설명을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 이후에 만난 세계 각국의 동포들과도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비록 동포이지만, '외국인'이고 나와는 다른 국가, 심지어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분들이니 그에 맞추어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법적인 처우와 무관하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북한동포도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외국인처럼 대하면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남한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북한 혹은 북한동포를 대할 때, 민족 동질성만 강조한 나머지 '같지 않음'을 탓하고 심지어는 '같아야(만)한다'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분명히 한민족, 같은 동포이지만 다릅니다. 미국, 호주, 유럽에 사는 동포들보다도 더 다릅니다. 해방 이후 긴 세월을 주체사상과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왔으니,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아래 살아온 (거리상) 먼 나라 미국이나 유럽의 동포보다도 (심리적으로 체제적으로) 더 멀고 더 다릅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 한반도의 바로 윗부분에 38선이라는 살을 서로 맞대고 살고 있지만,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습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온 말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간관계, 국제관계에도 통용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는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형성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통일한국, 평화한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통일된 평화한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현재의 남한 체제만으로 충분한가요? 물론 현재 상태로 만족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남과 북이 하나 되어 평화통일을 이루었을 때에는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분명히 북한이, 북한동포가 우리와‘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북한동포를, 탈북이주민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미 다 알고 있나요? 그렇다는 대답을 쉽게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면 편합니다. 상대방이 내 기대나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다르니까 그러겠지" 마음이 편하고 보다 쉽게 이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2017년은 '다름'을 인정한 연후에 '같음'을 추구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 서로 뭐가 같아야 하는지를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훈 목사2017-02-01

2017년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탄핵정국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 시기를 틈타 보수와 진보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나라를 하나로 아울러야 할 정부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어 연합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난국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동안 각 교단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의 시대를 겪었던 한국교회가 연합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7년 1월 9일,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칭)의 출범으로 한국교회가 전 교단의 연합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한국선교 13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교계가 앞장서서 축하하고 지지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아직까지 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한교총의 출범과 한국교회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이루어져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교총의 출범은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의 각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자라나기를 원하신다(골 2:19). 그러나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13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한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한교총의 출범을 계기로 삼아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이 땅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고, 복음 전파에 더욱 힘써야 한다.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나아갈 때, 이 땅에 제2의 부흥, 제3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둘째, 한국교회가 연합하면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동성애, 이슬람, 이단과 같은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다. ‘모든 것에 대한 다양성과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논리 아래 동성애와 이슬람, 이단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 지도자들의 공약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죄악 된 세상의 소리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를 대처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바른 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1,000만여 성도가 한 목소리로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면 정치 지도자들도 교회의 의견을 도외시하지 못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 지도자가 선출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기도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연합은 복음적 평화통일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선결 과제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민족 통일과 민족 복음화라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교회의 힘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나 큰 사명이며, 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어 힘을 합쳐야 한다. 북한은 현재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앞두고 한국교회가 분열하여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민족 통일과 민족 복음화에 대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나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서로 다툴 때가 아니다. 현재와 같은 혼란스러운 정국일수록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이 나라의 빛과 희망이 돼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경험을 통해 이 나라에 연합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가 성령으로 하나 될 때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하나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 된 한반도 위에 실현될 것이다. 한교총의 출범을 발판 삼아 한국교회가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하여 연합의 시대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윤영훈 소장2017-01-31

최근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의 인기는 엄청났다. 시청률뿐 아니라, 각종 패러디와 광고는 물론이고 특히 드라마 OST는 쟁쟁한 뮤지션들의 신보들을 넘어 음원차트를 초토화시켰다. <도깨비> 인기의 비결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도깨비, 저승사자, 삼신할매 등 인간의 생로병사와 밀접한 각종 민담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멋지게 재해석한 작가적 상상력에서 기인한다. 1990년대 이후 급부상한 판타지 문화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문화 트렌드다. 문학계와 영화, 드라마에서는 지속적으로 수많은 판타지물을 제작하고 있어서 그 예를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 장르 역시 대하 서사부터 시공을 초월한 로맨스, 그리고 호러물과 가벼운 코미디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판타지 콘텐츠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판타지 문화의 시대적 조류와 트랜드를 어떻게 평가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판타지를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먼저 노골적인 반기독교적 요소만 없다면 단순한 오락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거나, 판타지물 자체에 대해 경계하고 정죄하며 거부하는 극단적 입장이 있다. 단순한 수용과 비판에 앞서 우리는 이런 판타지 문화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잘 살펴봐야 한다. 도대체 왜 오늘과 같은 첨단 정보 통신과 과학의 시대에 이런 허황된(?) 이야기들이 큰 호응 속에 난무하는 것일까? 판타지 문화는 우리가 살고 경험하는 세상이 결코 이성과 합리성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자각을 일깨워준다. 사실 판타지는 인간에게 내재된 고유의 심리현상이며 인류 문명의 고유한 스토리텔링 양식이다. 예를 들어 <드래곤볼>이나 <날아라 수퍼보드>와 같은 애니메이션과 <최유기>와 같은 게임 프로그램,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사오정 시리즈'의 우발적 생활 유머는 모두 동양의 고전 <서유기>라는 문화원형의 현대적 파생물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천로역정>과 비교되기도 하는 고전 <서유기>를 이교도적 주술 문화라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또한 민족의 기원설화와 민담과 전설은 자연물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판타지 또는 신화의 형태로 전해져 왔다. 이러한 판타지적 문화원형들은 사회 구성원의 세계관과 관습, 그리고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며 공동체성을 마련하는 순기능이 있다. 이러한 판타지를 근원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울러 이러한 비현실적 동화를 통해 아이들은 꿈과 창의력을 발달시키며, 현실 너머의 상상의 힘을 키워가고 열린 공간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이런 동화의 비현실성을 자각하며 더 이상 판타지를 접하지 않는다. 결국 동화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현실 안에 종속되며 비전을 상실하고 일상에 함몰되는 결과에 빠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판타지 자체보다는 판타지 문화가 내포하는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고 일러주는 윤리성을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비평과 토의가 보다 활성화되도록 함으로써 문화 자체에 종속되는 것은 경계하고 문화의 상상력은 습득하는 균형 있는 자세가 요청된다. 살아있는 나무에 불이 타오르고, 지팡이는 뱀으로 변한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사람들을 인도하고 바다가 갈라진다. 노래와 함성에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고, 사람이 병거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사람이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나귀는 말을 한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살아있고, 까마귀가 양식을 물어다 준다. 사람이 물위에 서서 걸어다니고, 변화산에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사자들은 양들과 뛰놀고, 하늘에 사람도 아닌 짐승도 아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가 떠다닌다. 역사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판타지를 이야기하며,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 왔다. 성서의 상상력의 세계는 현실에 종속되어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을 너무나도 경이로운 판타지로 초청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현실과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분명한 현존과 그분을 신뢰하며 현실을 극복하고 사는 지혜를 배운다. 이처럼 풍부한 상상력의 보고인 성서를 우리는 너무나 도덕적인 규범과 지성적 텍스트로만 대하는 모더니즘의 한계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창조과학과 강해설교를 넘어 성서가 안내하는 거룩한 판타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 보는 것이 어떨까? 어릴 때부터 모세의 하나님이 보여주신 판타지를 듣고 배우고 암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눈앞의 골리앗의 거대한 현실에 상상력을 잃어버린 채 절망했다. 그러나 한 소년만큼은 자신이 들어왔던 그 판타지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골리앗 뒤에 보다 거대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상상력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담대히 달려나갔고 힘차게 맷돌을 던졌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영웅을 통해 자신들의 잃어버린 상상력을 회복했다. 이처럼 역사는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독교 문화 콘텐츠는 단순히 성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성극을 뛰어 넘는다. 성서 이야기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새로운 상황 속에 재구성하고, 그 안에 성서가 전하는 세계관과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 ‘금단의 선악과’ ‘출애굽 내러티브’ ‘메시아적 구원’ 등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세속 문화 콘텐츠 안에서도 자주 재현되는 문화 원형이다. 기독교 문화는 이전에 예수님이 복음의 진리를 일상적 우화와 스토리로 들려주셨던 것처럼, 또한 루이스와 톨킨이 지신들의 작품 <나니아 연대기>와 <반지의 제왕>을 통해 표현했던 것처럼, 창의적인 문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건강한 세계관과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꾼(storyteller)이 돼야 할 것이다.

조종건 사무총장2017-01-24

문맥의 이해가 없는 문구 해석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democracy)를 일컬어 “이따금 시도된 모든 다른 형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라고 말했다.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부라고 비판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처칠의 주장은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는 민주주의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탁월성을 주장한 내용이다. 요즘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해석한 성경 구절이 로마서 13장 1절~2절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사악한 정부일지라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극우 기독교인의 시각이다. 이러한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통령인데 어떻게 탄핵으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일부 극우 성향의 목회자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설득한다. 이에 동조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은 광화문 태극기집회에 참여하면서 태극기를 흔든다. 보수 성향의 목회자들도 이에 가세하거나 동조한다. 심지어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주도하는 이들도 있다.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권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할 당시의 맥락이 중요하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내용은 로마제국의 권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의 선교여행을 방해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동족인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지 로마의 지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로마법의 도움이었고 로마정부였다. F. F. 브루스도 ‘바울 자신이 로마법을 체험한 좋은 경험’ 즉 합리성 있는 로마법을 언급한다. 또 로마서는 기독교 핍박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지도자보다 로마의 합리성이 더 낫다는 바울의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4절에는 통치자인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라는 언급이 있다. 극우 기독교 리더들의 말처럼 사악한 왕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정부책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세 가지 면을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 마가복음 12장 17절에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한 예수의 말씀이다. 여기서 ‘가이사의 것’이란 세금에 관한 것이지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통치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사도행전 5장 29절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이다. 위임된 통치자 위에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의 가치에 맞춘 통치에 사도들은 협력하겠다는 의미이다. 셋째, 성서본문을 각 시대 상황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에 찬 사례들이다. 일제시대에 3.1운동을 이끈 양대 세력이 천도교와 기독교다. 만약 사악한 왕에게 복종을 거부한 것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른 것이라면, 당시 일본 천황 참배에 대해 복종을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일까? 유신시대에 하나님의 정의의 이름으로 저항한 크리스천들은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할 수 있나? 저항권은 교회의 유익한 가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는 루터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명령에 단호히 거부했다. 최초로 신구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들(1494-1536)은 의미심장하게 왕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것을 명령하면 순교를 달게 받을 각오로 불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존 낙스(1514-1572)는 “정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하지만 통치자가 불법을 행한다면 무장 반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장로교도 위그노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이후 칼빈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1519-1605)는 “모든 폭정에 백성들은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1776년 영국왕 조지 3세에게 저항했던 영국식민지 미국의 선조들, 특히 청교도들의 반란으로 미국독립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행위도 잘못된 믿음인가? 정당한 투표로 당선된 히틀러의 나치 체제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1906-1945)는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자인가? 독일 나치 위기의 시기에 미국 동료들이 본회퍼에게 영주권을 마련해 주려고 했지만 이를 기꺼이 포기하고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것이 개죽음이라면 본회퍼에 대한 모멸이요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흑인 인권운동의 중심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는 정부에 맞서 비폭력 시위를 했다. 흑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인권운동의 결실을 미국의 한인 교포들도 누리고 있다. 실낙원의 저자이며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칼빈주의자 존 밀턴(1608-1674)의 고뇌에 찬 통찰력을 한국교회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 되새겨보자. “나는 나의 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시저에게 양도할 수 없다.” 진영논리에 앞서 신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사회정의의 보편가치를 위해서라면 저항권은 교회의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한국교회에 사회정의를 위한 저항권이 자리 잡을 때, 제2의 종교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형욱 대표2017-01-23

“도대체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니까!” 얼마 전 상담한 자매의 볼멘소리다. 다음은 그 자매와의 상담 내용이다. 자매 : 도대체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요.. 상담자 : 무슨 일 있으셨어요? 자매 : 약 6개월 전 아는 지인 분을 통해서 한 명의 형제를 소개 받았어요. 그 지인은 '정말 신앙이 좋고 이른바 교회 오빠 같은 그런 분'이라며 찬양 인도도 잘하는 좋은 분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래서 일단 무조건 만나보자 하고 만났어요. 상담자 : 교회 오빠 같은 분은 어떤 분이시길래 선뜻 만남을 하게 되었나요? 자매 : 교회 오빠는 일단 분위기가 있어요. 뭐라 해야 할까. 너무 고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값싸게 굴지 않으면서 유머도 종종 있는. 그리고 찬양이나 기도도 나름 멋지게 하는 그런 오빠. 아무튼 좀 느낌 있는 그런 오빠에요. 상담자 : 참 어렵네요. 그런데 그렇게 좋은 오빠와의 만남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에요? 자매 : 오빠 만나서 3개월 정도 교제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2개월 전부터 보니까 이 오빠가 참 답답하더라구요.. 상담자 : 어떤 모습이 답답했나요? 아니면 다른 어떤 요인으로 인해 답답했나요? 자매 : 오빠는 조금 저랑 대화가 되지 않으면 그냥 말이 없어져요. 그리고 나서는 카톡을 보내도 대답을 한참 있다 하고 너무 답답해요. 상담자 : 대답을 바로 못해 주는 게 답답한 것인가요? 자매 : 아니요. 이런 어려움이 생기면 풀 생각을 안해요. 그리고 나서는 하루 이틀 지나서 스윽 나타나는 거에요. 그뿐이 아니에요. 그러다가 화가 나면 버럭 하며 욱하는 성격도 있더라구요. 다른 건 몰라도 대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으니 답답해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도대체 형제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종종 이렇게 유사한 이야기로 상담을 청해오는 형제, 자매님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된 질문은 '좋은 배우자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이다. 참 애매하다. 좋은 배우자란?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자동차를 보더라도 어떤 이는 “A라는 브랜드가 좋다”고 하지만 어떤 이는 “A는 딱 질색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좋은 배우자는 없는 것이고 다만 자기만 좋으면 그만인 것인가? 사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은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 상대방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과연 모두 좋아할 수 있을까? 관계란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좋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자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보자! 먼저 이 배우자가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식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뻔하기도 하고 식상하기도 한 것들을 잊거나 간과할 때가 있다. 신앙의 모습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선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떤 신앙인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나는 할 수 없고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그럼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믿고 비전을 향해 가는, 그런 신앙인을 만났으면 좋겠다. 또한 좋은 배우자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그의 입술에서 서로를 인정해주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는 '성격이 달라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몰라서이다. 성격은 우리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갈등을 잘 해결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이성교제를 해 봐야 한다. 상대방이 그리고 내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만남을 가져보고 또 갈등을 느껴보고 이런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필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느 정도 만나고 결혼을 해야 하나요?" 데이트 기간에는 많은 분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희노애락을 느끼고 결혼을 하라고 우리의 선배들은 말씀하신다. 이 희노애락이 참 중요하다. 이유는 이러한 희노애락을 함께 고민하고 누리는 것이 부부이기 때문이다. 좋은 배우자란 신앙을 견고히 지키며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그렇지만 그것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함께 성장하기를 결단하며 기도하는, 바로 내가 그러한 좋은 배우자인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야구선수를 스카웃 하기 위해서는 전문 스카우터가 야구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근본적인 것은 야구다. 야구를 잘 이해하고 잘 알면 좋은 야구선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좋은 배우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배우자가 되어야 함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김동환 목사2017-01-20

“공부는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 송나라 성리학 대가, 주자의 글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무척 쉽게 비유한 글입니다. 깊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저 역시 그의 글에 깊은 동감을 가집니다. “만일 아직 학문에 입문하지 못한 상태라면 다그쳐 공부해서도 안되고 쉬엄쉬엄 공부해서도 안된다. 이 도리를 알았다면 모름지기 중단하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 만일 중단한다면 공부를 이루지 못하나니, 다시 시작하자면 또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이는 비유컨대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 닭이 알을 품고 있지만 뭐 그리 따뜻하겠는가. 그러나 늘 품고 있기 때문에 알이 부화되는 것이다. 만일 끓는 물로 알을 뜨겁게 한다면 알은 죽고 말 것이며, 품는 것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알은 식고 말 것이다.” 공부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린 학생들이 매우 많습니다. 고 3 학생들 가운데 거의 4명 중 1명이 공부에 대한 우울증에 걸려있습니다. 공부는 닭이 알을 품는 것과 정말 비슷합니다. 한꺼번에 욕심을 내서 빨리 부화를 시킨다고 뜨거운 물에 넣으면 알은 부화되기커녕 죽게 됩니다. 공부도 하루 아침에 급격한 성적을 올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무리한 계획 속으로 집어 넣게 되면 며칠 못 버티다가 공부할 의욕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공부하는 것이 싫다고 공부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그동안 노력해온 공부는 금세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 마치 알을 품다가 그만 두면 알이 부화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는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계획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동안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역전의 기회를 삼는 것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꾸준히 하면서 자신의 인지패턴에 맞는 정교한 계획을 다듬고 또 다듬다보면 엄청난 가속도의 문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차원 이동이 가능한 셈이지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번의 그런 과정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귀한 데일리굿뉴스 가족 여러분! 너무 과욕부리지 마십시오. 너무 쉬엄쉬엄 공부하지도 마십시오. 높은 꿈과 희망을 바라보며 꾸준히 밥을 먹듯이 하십시오. 닭은 알을 품습니다. 힘들어도 끝까지 품습니다. 왜냐구요. 귀한 생명이 새롭게 나올 것을 믿고 기대하며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귀한 희망과 꿈이 힘들지만 열심히 인내하며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겨울 방학 기간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정종훈 교수2017-01-19

새해를 맞이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새해는 과거의 과오나 수치를 떨쳐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데 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를 바 없고, 내일 역시 오늘과 다를 것이 없다면, 특권을 누리고 사는 소수에게는 별 문제가 없겠으나,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절망이다. 부정과 부패, 불의로 뒤범벅이 된 어제처럼 오늘의 삶이 반복된다면, 오늘의 삶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고역이다. 나태와 안일과 무관심 가운데 사는 오늘 우리의 삶이 내일로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내일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리가 어제와 오늘을 의지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이고, 오늘과 다른 내일을 소망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의 통일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남북 간 상호 신뢰프로세스를 주장했던 정권은 그나마 쌓였던 남북의 신뢰관계를 산산이 부수었고, 통일 대박을 무책임하게 외쳤던 정권은 북의 정권이 갑자기 붕괴할 날만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했다. 더욱이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는커녕,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개성공단까지 폐쇄해버린 정권은 남북이 공식적으로 윈윈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포기해버렸고,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까지 완전히 차단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출발했던 지난 10년 동안의 보수 정권은 남북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20년을 잃어버리도록 했다. 하늘이 보기 싫어 두 눈을 가린다고 해서, 존재하던 하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무장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의 남북관계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북한이 정권 안보와 군사적 방어를 위해 필사적으로 구축한 핵무기를 해제하기 전까지는 어떤 교류도 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북한 정권이 스스로 백기투항하기 전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책임회피와 다를 바 없다. 정치란 무엇인가? 서로의 관심과 이해관계가 다를지라도 양보하면서 하나의 타협점을 만드는 것이다. 그 타협점이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미흡해 보일지라도, 긴장과 갈등과 대립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정치적인 타협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며, 당사자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는 것이다. 문제는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은밀히 야합하는 것이고, 더 나은 타협을 이룰 수 있는데도 게을러서 진지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했다. 박근혜 정부가 정권안보적인 차원과 비선실세의 주술적인 정치에 매몰되어서 민간 차원의 대북인도적인 사업까지 차단했던 부끄러운 어제를 청산해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국민들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서 국민이 위임하는 권력을 올바로 행세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창출해야 한다. 새해를 맞이해서 통일부 산하의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 우리 평화통일연대는 세상 정치권력의 위세에 위축될 것이 아니라, 실제적 권력자인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 평화통일의 여정을 만들어내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어느 신화에 의하면 새벽이라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닭이 울어서 새벽이 오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 평화통일연대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도 정유년 새해에 평화통일을 위해서 진정으로 울어대는 닭이 되어 평화통일의 새벽이 속히 오도록 기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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