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선 협력기관기자2020-01-20

□ 국제 정치경제 환경 변화 최근 국제사회는 미·중 무역 분쟁과 미국의 중거리 핵전략무기협정(INF) 자동 탈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중동 정세 급변 등으로 국제 정치경제 환경이 요동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경제, 기술에서 군사. 안보 분야까지 경쟁하면서 세계 패권을 두고 양국 간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외전략 변화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서 지역 다극체제로의 전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 간 권력 정치와 동맹의 이합집산 가능성이 확대되고, ‘지정학의 귀환’과 강대국 권력정치 부활이 가시화되면서 뚜렷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G-0’의 세계질서 속에서 불안정성이 커질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 정책과 선택적 개입은 하나의 단절된 현상이 아닌 오바마 행정부에서부터 나타난 연속된 미국의 인식 변화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거나 정부가 바뀔 경우에도 이러한 전략 변화의 속도와 강도가 다소 완화될 수는 있지만 중단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인구, 영토, 자원 등 경제의 3요소와 경제력을 두루 갖춘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이 원하는 새로운 규범과 제도 속에서도 소련과 같이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미국의 우위가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세계 중심축이 아시아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위상은 더 높아질 수 있어 장기적 국제 전략을 수립 추진이 시급하다. □ 세계 경제 및 무역 전망 세계경제는 글로벌 정책 불확실성과 경제 주체의 심리 위축에 따른 투자·제조·교역 위축, 미·중 무역 분쟁, 브렉시트, 일본의 수출규제, 중동 정세 불안, 중남미 불안, 북핵 문제 및 중국경제 둔화 등 지정학적 경제적 위협 요인 등으로 2019년 세계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3.6% 보다 낮은 3.0% 성장 예상되며, 2020년 3.2%, 2021년 3.3% 각각 성장이 전망된다. 2020년 세계경제는 선진국과 신흥국이 상반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선진국 경제는 하락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나 신흥국들은 올해 저점을 통과한 후 반등이 예상된다. 올해 세계 무역액은 미·중 1차 무역협상 합의와 미.EU 무역협상 재개로 지난해 1.2% 증가율 보다 높은 2.7% 증가율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 미국 경제 미국 경제 성장률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 2.3% 보다 0.2포인트 낮은 2.1%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개인소비는 취업자 수 증가와 임금상승으로 견조한 증가로 가계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재무구조가 개선돼 개인소비 여력이 충분하다. 내년 미국의 실질 가처분소득 증가율은 올해 2%보다 0.6%포인트 높은 2.6%로 전망된다. 실업률은 3.5~3.7%의 낮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며 임금상승률은 올해 3.2% 수준인 3.1%, 물가상승률은 연준의 목표 2%에 근접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성과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부진할 것으로 보이며 기업투자 증가율은 0.6%로 올해 2.1%에 비해 1.5%포인트 낮다. 지난해 6.4%와 비교하면 2년 사이 5.8%포인트 하락할 전망이다. 주택투자는 낮은 주택담보대출 금리로 당분간 호조를 이어갈 것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미국의 경기침체 촉발 요인은 인플레이션 급등에 따른 통화긴축과 유가급등, 금융 불균형이 거론되나 현재 경기 순환기에는 기대 인플레이션이 안정됐고 셰일가스 생산 확대로 경기침체가 초래될 가능성은 아주 약화됐다"고 언급했다. □ 유로(EU)경제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고용 여건이 양호하고 통화 완화 정책이 실시되고 세계 교역 회복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유로지역의 올해 경제 성장률은 전년보다 높은 1.2%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리스크 요인으로는 미·중 무역 갈등 확대, 미국의 자동차에 대한 관세부과와 유럽의 디지털세 부과로 인한 유로-미국 간 무역 갈등. 중국 경기부진 심화 등을 들 수 있다. □ 중국 경제 지난해 중국 경제는 6.1% 성장한 것으로 분석되며 올해는 6%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 정부는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로 확정했다. 경제 성장률 목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6.0%대로 제시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 경제는 미·중 무역 분쟁, 미-EU 간 나토(NATO) 방위비 분담 문제로 인한 마찰 등 불확실 요인이 상존, 경기 하강이 우려되고 있다. 중국 산업을 보면 2019년 1~11월 산업생산 누적 증가율은 5.6%로 집계됐다. 특히 정부 보조금 축소 여파로 순수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전기차 등 신에너지 차량 생산량은 41%나 급감했고, 스마트폰 제조량도 전년 동월보다 1.3% 줄었다. 고정자산 투자는 민간기업 투자가 소폭 증가했지만, 국유기업과 비교하면 상승세가 약해 현 경제 상황에 대한 민간기업의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소매 판매는 미·중 무역 분쟁의 불확실성 속에서 중국인들이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면서 4월과 10월 증가율이 16년 만에 최저치인 7.2%를 기록했다. 11월 소매판매액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8.0% 증가했다.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는 경제정책 목표 핵심 과제로 안정적 성장과 개혁 추진, 구조조정, 민생 혜택, 리스크 방지 및 안정 확보에 두기로 했다. 중국은 40년간 연 평균 9.4% 경제성장으로 경제·기술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중국 발전전략인 ‘중국제조 2025’를 수립, 미국을 추월한다는 구상을 내비치기도 했다. 2050년에는 세계 일류 지도국가로 부상하겠다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몽까지 더해 미·중 간 통상 분쟁과 기술 전쟁은 패권 경쟁으로 확대될 것이다. 미·중 통상 분쟁 1단계 합의에서는 추가 관세 보류와 기존 관세의 일부 축소, 지식재산권과 기술이전, 식품. 농산물 등이 총 망라됐다. 합의문은 서문과 지식재산권, 기술양도, 식품 및 농산물 등 모두 9개 조항으로 이뤄졌다 . 중국은 안정성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기업 부채와 채무불이행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크고 무역 분쟁의 불확실성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왕타오 이코노미스트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무역 분쟁의 불확실성이 기업투자를 위축시키고 기업 활동이 관세 분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면서 “경기둔화세를 지속하는 고정자산 투자의 회복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미중 통상 분쟁 미국은 안보면에서 중국은 경제면에서중요한 국가다. 남북관계 개선에 있어서 중국은 종속 변수에 불과한 바, 남북 문제는 중국에 호소를 지양하고 미국과의 분업을 통해 미국이 중국을 전담토록 하여 북중 관계를 견인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굳건한 동맹을 통해 미국의 대중 정책과 전략에 공조하는 방향으로 대외 정책을 추진해 나감이 바람직 할 것으로 보인다.한일 관계도 조속히 복원해 한미 동맹의 기조 하에 한미일 지렛대로 활용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한다. 또한 중국의 한국 경시와 한국외교의 제약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3불선언 페기가 요구되며 신 남방정책(아시안 중시) 강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등 관련 대책을 종합적으로 마련하고, 역내 중견국가로서의 역할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미중 무역 전쟁과 기술 전쟁, 한일 무역 갈등으로 성장과 교역이 둔화되고 저금리, 저물가, 투자, 소비 4저(低)의 불황으로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2020년 한국경제성장률은지난해 보다 0.1%포인트 높은 2.1%로 전망된다. 수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투자와 소비(내수)를 증가 시키겠다는 정부의 정책 의지가 담겨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 경제장관회의에서 ‘2020년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글로벌 경제 및 반도체 업황 회복과 내수 활성화 등 정책 효과에 힘입어 투자와 수출 중심의 성장세가 개선될 것”으로 보고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중 무역 분쟁이 1차 합의에 이르러 불확실성이 다소 해소되고 글로벌 경기가 바닥을 치고 개선세로 돌아설 것이란 기대감때문이다. 대내적으로는 반도체 회복세와 함께 확장적 재정과 투자·소비 활성화 정책을 동원하겠지만 세계 경제성장 둔화와 낮은 중국경제 성장, 북한 핵문제 등 대내외 여건을 감안, 2.1% 성장이 전망된다. □ 한국 경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미중 무역 전쟁과 기술 전쟁, 한일 무역 갈등으로 성장과 교역이 둔화 되고 있고 저금리, 저물가, 투자, 소비 4저(低)의 불황으로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는 2020년 올해 성장률 2.0% 보다 0.1%포인트 높은 2.1% 경제 성장이 전망된다. 수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투자와 소비(내수)를 증가 시키겠다는 정부의 정책 의지가 담겨있다. 정부는 2019.12.18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 경제장관회의에서 ‘2020년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글로벌 경제 및 반도체 업황 회복과 내수 활성화 등 정책 효과에 힘입어 투자와 수출 중심의 성장세가 개선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중 무역 분쟁이 1차 합의에 이르러 불확실성이 다소 해소되고 글로벌 경기가 바닥을 치고 개선세로 돌아설 것이란 데 기인된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반도체 회복세와 함께 확장적 재정과 투자·.소비 활성화 정책을 동원 내년 목표인 2.4%의 경제성장 달성을 위해 조기 예산 집행 등을 실시해 나갈 것으로 보이나 세계 경제성장 둔화, 낮은 중국경제 성장, 북한 핵문제 등 대내외 여건을 감안 시 2.1% 성장이 전망된다. 한국은 단기적으로 성장세 소실을 방지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저성장의 고착화 탈피와 디플레이션 예방을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 경제의 성장세 확대를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투자 활력을 제고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구조 개선을 해야 한다. 둘째, 소비 회복세 유지를 위해 고용 안정 및 소득 증대 등 실질 구매력 확충과 동시에 소비심리를 개선하기 위한 전 방위적 소비 부양책 마련이 요구된다. 셋째, 투자 활성화를 통해 국내 경제의 중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높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넷째, 건설 투자가 경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동산 시장 안정 및 SOC 투자위축 방지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국내 수출 회복세를 이어갈 전략을 마련하고 주력 수출시장의 리스크 방지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섯째, 스태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고 생활필수품의 물가 안 정을 유도 서민생활 안정에 주력해야 한다. 일곱째,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 신 지식산업에서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 □ RCEP, 한·중·일 FTA 등 다자 협력 한중일 3국 통상장관이 최근 북경에서 만나 FTA, RCEP, WTO에서의 다자 간 협력을 해나가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또 제 4국 시장으로의 3국 공동 진출이나 각국의 공통 관심사에 대한 상호 연결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에너지 등 분야에 대해서도 의견 교환을 갖고 인식을 공유했으며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어한중일 3국 정상도중국 청두에서회담을 개최하고 상호 협력 방안을 협의했다. 향후 한중일 3국간 FTA가 체결되면 세계 GDP의 21%, 아시아 GDP의 70%, 세계무역액의 35%를 차지하는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가 창설된다. 한중일 3국은공동 연구 체제를 마련하고 상호협력 시스템을 구축, FTA가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서비스 분야가 포함된2 단계 한중 FTA가 조속히 체결될 수 있도록 전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박종선 전주대 교수 - (현) 전주대 경영대학원 교수 중국 산동대, 청도대, 과기대 등 초빙교수 - (전) 중국 상해 수석영사 역임 - (전) 중국 청도 총영사 역임 - 2011 중국 경제학회 포럼, 한국 대표로 특별 논문 발표 - 아주경제 고문, 매일경제 대기자, 중국외교 관련 정책자문 등

이정기 목사 2020-01-19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세상속에서 구별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염전을 하시는 장로님이 하신 이야기이다. 어느 날, 일 하다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렸다. 바로 건졌는데, 커다란 가마니 속 소금이 모두 녹아버렸다. 소금은 애초에 바다로부터 취한 것이기에 바닷물을 만나면 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소금은 바닷물에서 취했기 때문에 바닷물을 만나면 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취한 소금과 같다. 그래서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소금의 속성이 있다. 이것은 오래 묵은 소금이나 금방 수확한 소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속화 되는 것은 금방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온갖 세상 유혹들을 경계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며, 구별됨을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름표를 하나 붙여 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라고 부르신다. 창고 안의 소금이 아니다. 됫박 안의 빛이 아니다.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주 무대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역삼투압 현상이 심하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맛을 내고, 빛을 비추어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맛을 내고, 세상 어두움을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들 사이에서도 구박 받는 것 처럼 헤매고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기 때문이다. 겸손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주님이 부르신 '정체성과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뒤뚱 뒤뚱 땅을 헤매는 오리가 아니라, 창공을 수놓고 물 위를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이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당에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은혜받고, 능력받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다니엘을 통해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세상을 거부하지 않았다. 세상을 무서워하거나, 세상이 더럽다고 회피하지 않았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자로 살았다. 다니엘은 민첩한 사람이었다. 총리들과 고관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10배나 나았다.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그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도덕성이 뛰어나야 한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끌어내리려고 뒷조사를 했다.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고 말하지만 다니엘은 달랐다. 그는 확실한 도덕성을 갖추었다.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다니엘은 맡겨진 일에 충성했다.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충성스런 다니엘은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단6:4절> 골3:22-23절을 보면 눈가림으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신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하고,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하신다. 사람은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 살았을 때보다 떠난 뒤 남긴 발자취가 더 빛나야 한다. 세상의 도전에 믿음으로 응수해야 한다. 간교하고 음흉한 사람들에 의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고 공포되었다. 그 나라의 왕 외에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기도하면 사자굴 속에 넣겠다는 법이었다. 다니엘은 그 법을 어겼을 때 사자굴 속에 던져져서 죽게 될 것을 알았다. 알고도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 전에 행하던 대로 주께 기도하고 감사했다. 사실, 쉽게 타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도를 공개적으로만 안하면 되는 것이었다. 30일동안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타협하지 않았다.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만약 피하였다면 다니엘을 해하려는 자들은 다른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응수한다. 결국 다니엘이 승리한다. 해하려했던 모든 사람들이 사자굴에 던져진다. 그 일로 인해 다니엘이 섬기던 하나님이 바벨론 도에서 높임과 찬양을 받으신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실력을 키우자. 흠없는 도덕성을 갖추자. 맡겨진 일에 충성하자. 세상의 도전에 믿음으로 응수하자.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킨다. 세상의 소금이 되자. 세상의 빛이 되자. 세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세상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책임지자.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키자. 다니엘로 인하여 바벨론도에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해지게 하자.

정재영 교수 2020-01-16

갈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갈등 속에서 보내왔다.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촉발된 정치 갈등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진영 논리와 이념 갈등이 있고, 이러한 입장 차이에 따라 서로의 주장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은 과거보다 갈등이 심해졌다고 느낀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 조사에서는 빈자와 부자,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청년과 중장년층 사이의 대립이 한층 깊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임명을 둘러싼 혼란으로 사회 갈등이 더 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70%에 육박했다. 2016년 국정농단 때는 촛불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탄핵을 외쳤는데, 지금은 탄핵으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다. 이 조사에서는 여러 사회 갈등 중에서 빈부 갈등이 심각하다고 본 의견이 77.3%로 가장 컸다. 최근 부동산 가격 상승, 최저임금 인상, 세금 문제 등이 이슈가 되면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이에 따라 빈부 갈등이 더 심화됐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젊은 층에서는 성별 갈등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20대에서는 74.9%가 성별 갈등을 사회 주요 문제로 꼽았다. 20대는 성 차별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에 대해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남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 세대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령 사회가 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데 그동안 뒷방 노인네 취급당하며 소외감을 느꼈던 노인들이 힘을 모아 당당히 의사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력을 이뤄 사회단체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들은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의 힘을 빌려 유튜브 방송을 하면서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기도 할 정도로 매우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정보들 중에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러한 노인 세대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와의 사이에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다. 특히 일부에서는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단순히 북한을 도운 경험이 있다든지 북한에 다녀 온 경험만으로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 교계 인사들도 이러한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문제로 여겨졌던 지역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이러한 이념 갈등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갈등에 빠진 한국 교회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정교분리를 주장해 왔고,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왔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권에 대해서조차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생각으로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왔을 정도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집권했던 보수 정당이 힘을 잃고 진보 성향의 정당이 들어서면서 교회의 입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시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진보 성향의 목회자들이 민주화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정치 활동을 벌였는데 최근에는 보수 성향의 목회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모습은 개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배 후에 교회당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 발언을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시국과 관련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온 사람들과 서초동에 나갔다 온 사람들이 제각기 집회 현장의 모습을 전달하며 자신의 입장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일부 교회에서는 대표 기도를 하는 중에 현 정부를 비판하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젊은이들이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그런 기도 내용이 교회의 공식 입장인지 묻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빈부 갈등과 세대 갈등, 그리고 성별 갈등 등의 사회 갈등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연되며 성도들끼리 부딪히고 있다. 교회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매우 금기시해왔던 기존의 풍토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서 정치 토론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 모습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자연히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건전한 대화와 토론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갈등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써 죄악 많은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지 않으셨고 정치적인 선동가가 되지 않으셨다.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여주셨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빠져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바쁜 모습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이념을 넘어 신앙을 바라보아야 하고 신념을 주장하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되새겨봐야 한다. 토론을 할 때에는 자기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억눌림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어야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기보다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셨지만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주셔서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신 방법으로 화평케 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새해에는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를 화평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신동식 목사 2020-01-12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였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병들었거나 죽은 양심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기에 세계가 인정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선물입니다. 양심은 법조문이 없을 때 법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법이 무질서하게 되면 사회가 무질서해집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법이 없을 때는 어떻게 사회가 유지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양심이 법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법전이 없어도 양심이 법전이 되어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합니다. 하지만 양심이 부패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심이 병들거나 죽어 버리면 사회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양심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양심이 병들자 나타나는 것은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탐욕이 양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를 나눈 자신의 형제도 죽이는 잔인한 일을 합니다. 형제도 죽일 수 있다면 친척과 이웃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양심이 굳어진 세상은 참으로 처참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밀하게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양심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손에 있는 성경은 양심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고장 난 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양심의 흔적이 있기에 세상은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압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양심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 된 몸을 입고 있기에 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잠시 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에 따라 양심이 작동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성경대로 죽으셨음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성경대로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언약 가운데 말씀하셨던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빛을 주신 죽음입니다. 그 열매는 성경대로 부활하심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복음에 사로잡혀서 작동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양심은 반드시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거듭난 양심의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은 복음에 사로잡힌 성도에게만 나타납니다. 복음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만의 신앙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머리에서 시작하여 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과 발로 나타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알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합당하게 신앙 생활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진동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실천으로 나타내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웁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다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부터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할 때 교회가 세워지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건강해집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시작하고 끝내기를 바랍니다.

정용구 선교사 2020-01-05

2020년이시작됐다.선교사들도선교지에서새해를맞이한다.필자가사역하던선교지에서는한국의‘송구영신예배’를기억하면서한인들이한인교회에모여서예배를드린다.그러나자정에가까운시간이되면치안도불안하고,현지인들도새해를맞이한다는기쁨에마음이들떠서술을마시고위험한행동을하는경우가많다.특별히늦은시간에외국인들이모임을하거나,이동을할경우쉽게주목받기때문에신변에위험을맞닥뜨리게되는상황이많다.따라서자정가까운시간에송구영신예배를드리는것은많은위험을감수해야만한다.그런만큼송구영신예배시간만큼은고국에있는성도들과같이예배를드린다는설정아래,한국시간으로새해가되는시간을계산해예배를드렸다.한국시간으로자정은선교지현지시간으로오후8시30분이다.이시간대는별무리없이안전하게송구영신예배를드릴수있다.그리고재미있는것은송구영신예배를마치고집에돌아오면이제선교현지시간으로자정이되기에한번더새해를맞이하는특별한경험을하게된다. 선교사들도신정(1월1일)이나구정을맞이하면한인마트를통해비싸지만어렵게떡을구해서떡국을끓여먹는다.선교지에서감히떡국을먹을수있다는그자체만으로도감사를드리고,특별히한국음식이몇가지더곁들여지면감사가이어진다.많은선교사들이이런특별한날을기억하고,한국에서올때가지고오는대표적인식자재중에하나는잡채를만들기위한‘당면’이다.부피는크지만무게가가벼워서항공기로오는편에넣어도크게무리가되지않고‘한국의잔치음식’으로내놓기에도가장적절한음식이기에이런특별한날에는잡채요리를많이접하게된다. 식사후에는선교사자녀들의세배가이어진다.현지학교교복과편안한옷에익숙한선교사자녀들이갑자기등장한‘한복’을입는다.어색하고낯설어서그런지행동이부자연스러워진다.한국에왔을때에는주로할아버지할머니에게세배를했던기억이있었던그들이마주대하는것은선임선교사나,나이가좀있으신선교사님께세배를하게된다.선교사자녀들은한복도어색하고,세배도어색하다.세배를받는분도어색하긴마찬가지지만이모습을지켜보는동료선교사들은너무나즐거워한다.그러면서도한편으로는이선교사자녀들이‘자신들의진짜부모들께세배를드리면,부모들이얼마나좋아하실까?’라는생각과함께고국에계신부모를생각하면서조용히눈물을훔친다. 이어지는순서는‘윷놀이’다.한국에서야볼것이나할것도많지만,선교지에서는그렇지않다.그래서가장많이하는것중하나가‘윷놀이’다.선교지에서윷놀이는묘한감정을불러오기도한다.오랜만에승부욕을발휘해열기가더해진다.그럴때면늘진지하고,조심스럽게선교지에서일하는선교사의모습이아닌다른모습에서로놀라기도한다. 선교사들은짧지만이를통해잠시고국을생각하며새해를맞이한다.한국을그리워하며,잠시나마한국음식과놀이로그리움을달랜다.또이러한시간이되면잊지않고고국을위해기도한다.특별히한국교회의영적인부흥과선교를향한열심이일어나기를위해기도한다.한국교회는이러한선교사들의기도가응답이되도록,하나님이주신2020년하루하루를귀하고소중하게살아야한다.그래야우리의‘삶의현장에서하나님의나라’를확장할수있고,하나님의축복을함께경험하는은혜가이어지게될것이다.

박종화 목사 2020-01-01

2020년 새해가 밝았다. 묵은해를 보내는 아쉬움도 있을 수도 있지만 새해를 맞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아쉬움을 능가한다. 그것은 새로움을 향한 희망 때문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로움을 갈구하며 만들어 간다. 지난날 씨가 뿌려지고 자라고 있는 희망은 새해에도 결실로 이끌어 오는 일이고, 동시에 새해에 맞는 또 다른 새로운 희망은 놓치지 말고 붙잡아 새 역사의 현장에 둥지를 트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계승과 창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것이다. 계승과 창조가 만나고 협력해 선을 이루는 현실이 바람직한 새 역사이고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신년에는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먼저 이미 시작한 평화의 미래가 단계적으로나마 확고하게 펼쳐져야 한다.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분단과 적대적 대결의 가시밭길이 2018년 평창 올림픽 평화축제를 계기로 거둬지는 모양새를 취하더니 2019년 한 해는 다시금 먹구름이 덮이고 말았다. 2020년에는 다시 희망을 일깨워야 한다. 금년은 민족 고난의 정점인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에 한국판 ‘바벨론 포로 70년’은 이제 종지부를 찍고 전쟁이 아닌 평화의 발걸음을 과감하게 떼야 한다. 북미 간의 핵협상, 남북 간의 화해 협력, 한반도와 동북아 주변국 간의 공동 안보와 평화, 이 모든 필요한 과정을 슬기롭고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최소한 남북과 주변 당사국들이 함께 동의하고 보장하는 방식으로 종전선언을 이끌어 내고 종국적으로는 평화협정의 단초라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일에 주님이 약속하신 ‘평화’의 약속을 믿고, 이 땅을 ‘새 하늘 새 땅’의 둥지로 재편하는 사명에 기도하며 헌신하기를 기원한다. 또 하나 우리 한국사회의 온갖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상생과 화해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걸음걸이가 만든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고속 성장과 첨단 기술의 발달 그리고 한류를 중심한 문화예술의 창달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수많은 나라들이 이를 벤치마킹하려고 야단들이다.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 뒤안길에는 양극화의 질병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급격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중에서 자살률은 최고치를 점하고, 경제성장의 물결 속에 빈부격차가 급등하며, 이념과 진영논리에 따라 극단의 대립과 대결이 자행하며, 자유민주사회의 특징인 다양성을 상승적으로 소화하지 못해 ‘다름’을 ‘틀림’으로 왜곡하면서 적대관계를 만들어내는 천박한 후진성이 적폐로 남아있다. 속상하고 통탄스럽다. 교회는 신앙인 개인의 영적 구원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으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너 죽고 나 죽 는’ 불의가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화해와 상생의 복음을 실천하는 ‘공적 소명’에 충실하자. 마지막으로 교회 스스로의 갱신과 희망살기에 나서자. 교회는 온갖 갈등과 대결의 현장에서 ‘중심’의 역할을 하면서 화해상생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좌우의 어정쩡한 중립도, 상하간의 무력한 중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표징으로 사는 교회는 다양한 지체인 구성원들이 서로 만나고 엉킨 것을 풀고 화해하고 상생을 가능케 하는 열린 희망의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 중심은 세상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소금’이다. 중심은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 기독교 미디어와 기독교 봉사 기관들도 이러한 ‘새 일’ 만들기에 앞장서야 한다.그러면 ‘서로 협력해 선을 이루는’ 역사가 축 복 의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박종화 목사 국민문화재단 이사장 경동교회 원로

여주봉 목사 2019-12-30

나는 지난번에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비전과 관련한 네 종류의 사람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전은 그 단어(vision)가 의미하는 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보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 또한 그 핵심은 결국 ‘보는 것’이다(마 13:10-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리킨다(19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선포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계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셨다. 따라서 여기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이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듣고 본 네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당시 그 ‘씨앗’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고, 그 결과 또한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비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비유에서 길 가에 해당하는 자들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한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13-15절 참조). 길 가는 굳은 마음을 상징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지혜와 경험과 전통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리저리 판단하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정확하게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셨다. 그 많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 뛰어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儀式)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랑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에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이 정통적이었을지 모르지만(마 23:1-3 참조), 그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나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요 5:37), 당연히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 결과 그들은 나름대로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소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들은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방랑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소명을 받았지만,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마치 큰 그림의 각 퍼즐 조각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각기 달랐듯이, 다를 수 있다. 조지 바나는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할지라도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각기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서로 경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세워질 수 없다. 그저 벽돌만 많이 쌓아 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벽돌들이 설계도를 따라 각기 제자리에 놓여야 방과 부엌과 거실이 되고, 더 나아가 집이 된다. 그리고 건물이 그렇게 세워질 때, 어떤 건물은 가정집이 되고, 어떤 건물은 상가가 되고, 어떤 건물은 학교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그 일에 성도들과 교회의 사역이 맞추어질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그런 사람이 바로 방랑자다. 그런데 조지 바나의 인터뷰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개인이건 교회건 혹은 기독교 단체건, 방랑자가 매우 많다.

이영훈 위임목사 2019-12-29

2019년은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사회 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한 해였다. 사실 사회 상류층 중 일부가 편법으로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 및 강화하고, 심지어는 그 지위를 자녀에게 상속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오랜 병폐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시민들이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시민 의식을 성장케 하는 일이자, 선진 사회를 구현하는 긍정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동안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이 최근에 이를 지적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정의 실현의 열망이 커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정의 실현을 외치는 이유가 불의 자체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부당하게 손해를 보았다는 피해의식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은 우리 사회의 경기가 어느 정도 잘 돌아갔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부패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사람이 만족할만한 몫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불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받지 못하게 됐으며,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의 불의에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능력대로 공정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의 능력을 ‘정당하게’ 가치를 매기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과 성과만으로 대우를 해줘야 진정 정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본연의 능력과 혈연, 지연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주어진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엔 품꾼을 고용하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은 아침 일찍 나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뽑았다. 그리고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도 나가서 같은 값을 약속하며 일할 사람을 뽑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나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뽑았다. 그리고 오후 6시가 됐을 때 아침 일찍 온 사람부터 오후 5시에 온 사람까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러자 일찍 온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자신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 일꾼들이 착각한 점이 있다.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도, 아침 일찍 고용된 사람도 모두 포도원 주인의 은혜로 고용됐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들은 고용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은혜로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은혜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진짜 정의는 사라지고 분열과 다툼만이 남고 말았다. 물론 정의는 옳다. 그리고 반드시 실현돼야만 한다. 하늘의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흘러야 한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분은 은혜를 받는 자가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정의를 외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행복한 인생은 능력대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누릴 때 이뤄진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겸손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자.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임한다. 이제 연말이다. 겸손하게 마음을 낮춰 은혜를 누리고, 서로 은혜를 나눠 따뜻하고 행복하게 2019년을 마무리하자. 진정한 정의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은혜를 나눌 때 하늘로부터 임하게 될 것이다.

허성욱 이학박사 2019-12-19

성탄의 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동정녀(童貞女) 탄생의 신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동정녀 잉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 여부를 질문할 일이 아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의 소치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창조에 참여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오실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대책이신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이 신비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들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예수님은 구속주로 오시면서도 선민의 혈통만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는 예수님을 유다와 그 며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의 후손으로, 모압 여인 룻(룻 4:17-22)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다. 대개 인간이 지어낸 여러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을 다스리려고 이 땅에 출현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다스리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 왕께서 자기 백성을 섬기려고 오셨다.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오신다. 이것이 무슨 과학으로 이해돼야 할 일인가?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그 교조(敎祖)가 있다. 그러나 그 교조들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구주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교조는 아무도 절대 주권을 가진 창조주가 아니다. 또한 다른 종교의 교조들은 정상적인 잉태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100% 인성만을 가지고 있다. 신성(神性)이 수도(修道)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반면에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잉태되셨다. 동정녀 잉태이다. 죄성 없는 잉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100% 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시는 방법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흉내 낼 수 없다. 동시에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면 과연 이 일은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한마디로 전혀 불가능하다. 이 동정녀 잉태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설명해 보려고 몇몇 과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창조의법칙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별한 방법,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과학적 섭리로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물리 세계의 법칙마저 창조하신 창조주 그 분만이 초과학적으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그것을 우리 과학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적의 법칙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독특한 섭리 사역이다. 주님이 그렇게 오신 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할 뿐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정용구 선교사 2019-12-15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당시 121만 명에 불과했던 연간 대한민국의 출국자 수는 2019년 올 한해 2,890만 명에 달했다. 엄청난 숫자가 해외로 나간다. TV에서도 드라마와 요리 방송 못지않게 많이 방영되는 것이 ‘여행’ 프로그램이다. 교회의 비전트립(‘단기선교’, 이하 ‘비전트립’)도 옛날에는 주로 여름에 많이 진행됐지만 요즘에는 겨울에도 적지 않은 팀들이 사역을 진행한다. 비전트립에 대한 책을 쓰고,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팀을 만들어 인솔도 한다. 특히 선교현지에서 선교사로서 팀을 받아 본 입장에서는 비전트립팀이야 말로 너무 귀한 하나님의 선교자원이다. 비전트립을 위해 적지 않은 훈련과 팀워크, 선교지를 방문해서 선교사와 선교지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를 위해 가장 근접하게 준비된 일꾼’들이다. 모두가 선교사로 나가지 않아도 ‘선교를 위한 동역’으로 ‘가장 큰 선교동력’이 될 가능성이 많은 집단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비전트립 후에 구체적인 선교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들이 선교현장에서 보고 배운 귀한 것을 자신의 교회에서 더 구체적인 선교사역으로 이어지도록 사명을 가지고 ‘선교동력’으로 자신의 교회에 녹아져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다음과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비전트립을 다녀 온 뒤에 많은 선교학교나 훈련들이 이어지지만 그 중간단계에서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문화공연 기획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를 통해 기획자는 관객들을 위해서 사전에 공연에 대한 역사적 흐름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제공한다. 또 공연 후에는 관객들과 함께 다시 공연 후 이해되지 않거나, 자신의 느낌을 나누는 과정을 거쳐 공연을 더 깊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과정을 비전트립에도 좀 적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전트립을 위해 선교현지도 미리 공부하고, 사전준비와 훈련도 한다. 또 현장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비전트립을 마친 후에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훈련하는 팀을 잘 보지 못했다. 비전트립의 현장사역 기간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짧은 일정에서 놓친 부분이나, 함께 나누지 못한 마음을 같이 나누고, 어렵게 만든 선교동력을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다. 하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모임에는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는 것 같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비전트립 선교보고예배와 영상과 회계결산으로만 마무리하면 안 된다. ‘선교동력을 향한 연결 사역’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다녀 온 사역에 대한 ‘심화연구, 발전된 후속사역 준비, 다음 팀을 위한 훈련, 6개월, 혹은 1년 사역 이어가기, 비전트립팀의 선교동력을 통한 우리교회 선교활성화’ 등으로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한 번의 비전트립에는 많은 수고와 인력과 재정이 들어간다. 이 귀한 선교동력을 한 번의 이벤트 행사로 그치기보다 교회의 제대로 된 선교동력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동안의 비전트립이 ‘가는 것’에 많은 비중을 뒀다면 이제는 ‘갔다 와서’에 비중을 둔 ‘포스트 비전트립(Post Vision Trip)’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내실 있는 비전트립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비전트립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비전트립이 ‘다음세대 한국교회 선교동력’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함께 했던 비전트립을 함께 갔던 지체들과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기를 기대한다.

정재영 교수 2019-12-08

교회학교의 쇠퇴 최근 한국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 비상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주일학교는 감소를 넘어 해체로 치닫고 있다.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규모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2010년부터 주요 교단이 총회에 보고하는 교세 현황은 주일학교 해체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 48%, 중등부가 없는 교회 47%, 초등부가 없는 교회 47%, 유년부가 없는 교회 47%, 유치부가 없는 교회 57%, 유아부가 없는 교회 97.4%,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에 이른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교회에 중고등부와 유초등부가 없는 형편이다. 다른 교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우리나라 10대의 종교 구성비에서 개신교가 22.1%가 나온 것을 보면 비율 면에서 개신교 청소년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저출산으로 인해 청소년 인구 자체가 줄어든 것이 큰 원인이라 여겨진다. 10년 전에 비해 10대 개신교 인구가 7.1%, 10세 미만이 17.3% 줄어든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교회 규모가 교인 수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의 경우에 주일학교를 따로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교인 수 100명 이하의 소형 교회가 전체 교회에서 대략 70% 정도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 50명 이하의 교회가 또한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추정한다면 전체 교회에서 약 절반 정도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주일학교를 늘리는 것은 출산율 증가와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직접적인 대책이 되지는 않겠으나 교회마다 교회 학교 교사 지원도 줄고 있고 그나마 운영되고 있는 주일학교도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청소년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 중고등부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기독 청소년들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였다. 기독 청소년에 대한 실증 조사가 거의 없는 데다가 기존의 조사가 실태 파악 위주로 이루어져서 교회나 교회 중고등부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는 어른들의 관점이 아니라 청소년의 관점에서 교회와 중고등부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함으로써 교회 학교 운영에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하였고, 중고등부 예배가 없어서 어른 예배를 드리는 경우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청소년들의 인식도 파악하여 기독 청소년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갖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청소년 사역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족 종교화 되는 기독교 이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모태신앙 50.8%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이전에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결과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서 정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고등학생 때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특히 교회에 출석한 계기는 70% 정도가 부모를 따라서 왔다고 응답하여 비기독교인 가정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 교회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도 예배나 설교가 아니라 가족을 따라서 다닌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가족 종교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기독교가 끼리끼리의 종교로 전락할 우려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여러 항목에서 부모가 모두 교회 출석할 경우에 신앙의 영향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부모 모두 비기독교인인 경우에는 교회에 계속 다닐 의향도 상대적으로 낮게 나와서 기독교 가정이 아닌 학생들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부모 중 한분만 교회에 다니는 경우에 가정 안에서 교회에 나가고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더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교회에 대한 이미지도 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신앙의 강요가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자녀의 신앙 교육에서 보다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성장에 가장 도움을 받는 것은 예배/설교라고 했지만, 학생예배에 대한 만족도는 51.2%로 높지 않았다. 어른 예배에 드리는 경우보다 오히려 낮게 나왔다는 점에서 학생 예배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공과공부에는 70% 정도만 참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족한다는 응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학생 예배를 드리는 청소년들 중에 3분의 1 정도만 공과공부를 의미 있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공과공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지도 목회자에 만족도가 비교적 낮게 나온 것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모범이 되고 영향을 받는 인물은 부모였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나서 부모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 경제 수준이 높을수록 아버지가 기독교이 비율과 부모 모두 기독교인 비율이 많아진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것은 경제 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많고 특히 자영업자들의 경우 휴식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영업에 매달려야 하는 실정이므로 종교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기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또한 경제 수준이 상층인 학생들과 기독교인 부모를 둔 학생이 상대적으로 삶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난 결과로 볼 때 경제 수준이 낮고 그래서 부모 모두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에 자녀가 교회에 나오기도 쉽지 않고 삶의 만족도 낮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경제 수준이 낮은 경우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여 경제 수준이 낮은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 밖 청소년에 관심 가져야 이 조사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 청소년들의 대해서도 조사했는데, 이 경우 역시 부모의 신앙 여부가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모두 비기독교인이거나 모두 교회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본격적인 관심이 생길 시기인 중학교 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회를 떠난 이유도 교회 출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나와서 이 시기에 신앙이 잘 정립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중에 절반은 여전히 분명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4명 중 3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으며 10명 중 6명은 교회에 다시 출석하고자 하는 의향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 주일학교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 서민 자제, 특히 노동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일요일에 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했던 자선교육 기관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제도화가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신앙 교육을 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번 조사 결과처럼 교회 청소년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인 상황에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구체적인 사역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경제 수준이 높고 안정된 부모를 둔 자녀들이 교회에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저소득층의 청소년들, 이른바 위기 청소년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에 대한 교회의 사역이 교회 안 청소년들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한 선교적 차원의 다양한 사역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정용구 선교사 2019-12-06

겨울이 다가오면서 한국에서는 김치를 대량으로 만드는 ‘김장’이라는 특별한 풍경들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김장은 오랫동안 먹을 김치를 맛있게 만드는데 목표를 두지만, 선교지에서의 김장은 ‘김치’ 그 자체를 만드는 것에 목표일 때가 많다. 왜냐하면 선교지에서 제대로 된 김치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다. 외국에서 이러한 재료를 구해서 한국의 김치 맛을 완벽하게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김치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필자가 사역했던 지역에서는 배추를 구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배추를 절이기 위한 굵은 소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가져 오는 것도 무게가 많이 나가 다른 것을 두고 소금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다. 결국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가는 소금을 구해 물에 녹여 그 물로 배추를 절인다. 또 하나 넘어야 되는 산이 있다. 배추를 씻어야 하는데 석회가 많이 포함된 선교현지의 물은 수질오염 때문에 결국 마지막 해금(헹굼) 과정에는 정수기의 물을 사용하거나, 구입한 물로 해금을 한다. 특별히 더운 날씨에는 김치를 보관하기 어려워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김치 냉장고를 받거나, 한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냉장고를 보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렵게 김장을 해서 김치냉장고에 저장해 놔도,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더운 날씨에 모든 김치가 썩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해외에도 많은 물자공급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게 김치는 귀중한 음식이다. 그래서 한인들이나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조달된 재료로 현지식으로 김장을 하고, 많지 않은 양이지만 한인들끼리 김치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선물이 바로 김치다. 이것도 배추가 있거나 식재료가 있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식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김치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하는 지역이 더 많다. 그런 지역은 말이 김치이지, 한국에서의 김치와는 모양과 맛이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는 흔하게 먹던 김치로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만두 등 많은 김치요리들을 접한다. 따라서 김치가 귀중하다는 것을 제대로 몰랐지만, 선교지를 경험하고 오니 그 귀중함을 알게 됐다. 또 음식을 귀하게 여기고 더욱 감사함으로 음식을 대하고 있다. 선교사는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만 먹고, 현지인처럼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선교사도 김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거기에다 오랫동안 먹었던 음식에 대한 체질이 있어서 잘 먹어야 건강하게 선교를 잘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점점 김장을 하지 않고 구입해서 먹는 가정이 늘고 있다. 많은 먹거리들로 인해 김치는 외면을 받을지 모르지만, 아직 해외에서는 한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먹거리의 하나다. 혹시 해외선교 현지에서 선교사들의 가정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적은 양이라도 김치 선물을 한 번 준비해서 드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선교지를 방문해 주신 어머님과 장모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정성껏 김치를 담아서 선교지에 가져 오신 김치가 오랫동안 큰 위로가 된 경험 때문이다. 젓갈의 향내와 국산 고춧가루의 선명한 색깔, 그리고 적절하게 절여지고 익혀진 배추, 무엇보다도 선교지에서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자녀를 위해 노년의 나이에 그 힘든 김장을 홀로 하셨을 모습이 그려지니 그냥 김치와는 분명히 달랐다. 김장철마다 흔하게 담그고 먹는 김치이지만 그 김치도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다르게 만들고, 다르게 먹는다. 한국과 다른 선교지에서 특별하게 김치를 접하는 선교사들을 함께 응원하기를 기대한다.

이정기 목사 2019-12-01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총체적인 위기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 존재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과 불평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책들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연결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향해 대언했더니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된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1: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지고 눈이 뜨였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3:16-17)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일터는 창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게 된다. 느헤미야 8장에는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운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흥은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다.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여 모이는 곳에 임한다.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도,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도, 미스바에서 일어난 승리의 역사도 모두 사모하여 모일 때 일어났다. 어느 때든지 축복과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축복과 부흥 전에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말씀이 더 듣고 싶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전조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젓을 사모함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벧전2:2)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말씀이 귀하게 느껴지고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리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믿음의 역사가 있어서 소문난 교회였다.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 비결은 말씀받는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살전2:13절에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에, 그 말씀이 믿는자들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칠월에는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초막절을 지킨다.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한다. 안식일 날 해서는 안될 일들을 금한다. 안식년을 똑바로 지킨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종만큼 복된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축복하시고, 순종하는 만큼 사용하신다. 참된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으로 시작된 부흥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진다. 신앙의 수준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이 필요하다. 말씀이 깨달아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새 지식 정보 산업이 뜨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엄청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원하는 지식 대부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안에 있다. 말씀 안에 사는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의 길이 있다.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문제도 풀리고,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인간관계도 풀리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작은 사업을 해도 말씀 중심적으로 운영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말씀없이 잘사는 길은 없다. 말씀없이 성공도 없고, 말씀없이 성숙도 없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기뻐하고,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부흥 많이 체험하며 사시기 바란다.

여주봉 목사 2019-11-27

지난번에 나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라는 사실과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나누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4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나나 조지 바나나 헨리 블랙가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방랑자.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른다. 졸병. 비전을 볼 줄 알지만,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성취자.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한다. 리더.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그 부분을 약간 변형하여 비전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전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랑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 겁쟁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 성취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 리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 방랑자. 방랑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자기가 세운 비전이나 목표 혹은 꿈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방랑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어른들, 십대들, 목회자들, 교회 스텝들, 정계와 재계 리더들, 비영리 단체와 선교단체의 장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무려 20만 건의 넘는 인터뷰를 가진 후에 내린 몇 가지 결론을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에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몇 개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대부분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이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들의 회중들의 삶과 지역사회의 삶에 거의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비전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역 교회에 내에서 당회나 청빙위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하면서 그를 검증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서 교회의 비전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슷하게 모든 개신교 교회 20개 중 한 교회보다 더 적은 수의 교회만이 그들의 평가 과정에 대한 열쇠로서 그들의 비전 진술서(vision statement)를 사용한다.” 이것을 보면,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랑자인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 비전과 소명은 다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유가 소명과 비전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건 단체건 그것은 소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전은 소명과 다르다. 비전은 소명 그 이상이다. 한 예를 들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복음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삶을 드렸고, 그것을 위해 준비했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신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 교수가 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1991년 이전에는 방랑자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각 교회는 그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여러 목표를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며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아니다. 조지 바나도 그런 점에서 교회의 mission(소명)과 비전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mission을 비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소명은 각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더 명확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서, 내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나의 목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내가 목회 중에서도 어떤 종류의 목회를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의 사역을 위한 비전이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일 중에서도 어떤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지, 하나님을 위한 일들 중 어떤 일을 거절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등 우리의 사역을 위한 방향을 설정해 준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뒷받침하신다. 이것은 개인과 단체 모두 마찬가지다.

이효상 원장 2019-11-24

2016년에 약 15년 간 하던 사역을 그만뒀다. 3년 임기를 다섯 번 다 채운다는 것은 과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사실 머리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만두고 사무실을 연 것이 ‘근대문화진흥원’이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교회처럼 이상한 것도 없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미래는 없다. 미래를 여는 빛이자 등불이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근대문화자료를 3,000여 점 정리하여 데이터화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선 지난 4년간 발표한 100편의 칼럼과 논문, 신문, 방송, 포럼, 잡지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하여 심포지엄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근현대 역사에서 기독교 문화는 복음의 풍성함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상과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와 증언이 주는 감동이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2017년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 ‘별이 된 시인 동주’ 전시회와 시 낭송, 콘서트가 그렇다. 창조와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교회가 무슨 문화에 관심을 두느냐는 일부 목회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기도 했다. 교회는 신학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문화적 대변혁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의 크리스천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특별히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오고 있는 때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매년 10월 31일이 되면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집마다 다니며, 사탕과 초콜릿 등을 얻는 축제이지만 해마다 살인마 흉내를 내며 총기 난사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핼러윈(Halloween)축제가 그렇다. ‘총격’으로 얼룩진 미국산 축제를 국내에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락한 이 세상의 문화는 반신적(反神的)이고, 심지어 사탄적인 문화가 아닌가 할 정도로 막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흔히 문화와 문명 개념을 뛰어넘는 고도한 문화 이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반문화적이라는 이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다. 이는 사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잘 다스려서 그 피조세계에 그 뜻을 잘 드러내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문화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을 실현하고, 인간의 인간됨을 실현해내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얼마 전 가톨릭 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명함을 받고 놀랐다. 가톨릭 본부에서 직접 가톨릭 영화제를 담당하고 매년 진행하고 있어서 의외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하는 것과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의 생각과 힘을 다해서 그분의 의도에 부합하게 잘 개발하여 원하시는 문화(culture)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온전한 문화’라면, 인간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서 피조계에 힘을 가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변형시키는 것을 ‘잘못된 문화’라 말할 수 있다. 뉴에이지(New Age) 운동처럼, 종교성을 제거한다면서 인간성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식의 문화가 현저하게 나타남도 사실이다. 기존의 사회 ·문화 ·종교에서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여 영적 공허를 느낀 사람들이 신비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와 과학 ·심리 ·기술 ·정신분석 등을 혼합시킨 뉴에이지가 그렇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이 생성해내는 문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구속함을 받은 크리스천의 사명은 문화 변혁이다. 기존의 잘못된 형태의 문화나 정치를 방치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변혁해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변혁사역을 해야 한다. 변혁사역은 결국 거듭남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적(神國的)이다.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리 순수해도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적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단순한 흥미나 취미, 여흥을 위한 수단 정도라고 여긴다면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런 문화 사역은 하나님 나라적인 것이 없고, 따라서 오래 갈 수 없다. 이런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과 더불어 받은 소명에 따라서 각 문화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들이 있어야 참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은 글 한편, 그림 한 장, 찬양 음반, 찬양팀의 집회, 기독 서적, 동영상, 문학의 밤, 기독교 유튜브, 기독영화 한편 등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다. 교회는 이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넓게 지지해 나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며, 지성인과 시민들에게까지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지지기반이 없으면, 크리스천인 전문가가 아무리 능력을 지닌다 해도 한 사회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전문가를 폭넓게 지지하는 교회의 관심과 지지가 있을 때 진정한 문화 변혁이 이루어진다. 신실하게 이런 문화 변혁 활동을 하는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도 크게 나타나 결국 세상은 끝까지 영적인 전쟁터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전쟁터에서 깨어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피 흘리며 묵묵히 감당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 세상에서 무엇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문화 변혁 사역을 하기보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우리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이 일을 꾸준히 진행해 나가므로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주께서 ‘문화’의 주로 임하셔서 그런 노력을 의미 있게 보시며 인정하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의 본 무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손으로만 온전함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 사역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첨병들이다. 학문과 문학, 문화사역은 바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사역해야 할 장이며, 이는 우리의 삶이 주께 드려지는 합당한 산 제사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 / 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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