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2018-06-19

몇해전 교계단체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들이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응답자의 90%가 한국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를 지도자들의 명예와 욕심, 공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라 지적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기자들은 한국교회의 연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라 지적했고, 한국교회 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을 교권과 명예에 대한 ‘지도자들의 욕심’이라 답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가 심각함을 엿보게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이유가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노화되고 고령화되어 6.13지방선거에서 보듯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정당과 같은 이미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젊은 다음세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올드보이》(Old Boy)는 박찬욱 감독이 2003년에 찍은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처럼 기존세대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소통이 되지않고 단절되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올드보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의 문제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후유증도 따지고 보면 일선 교회나 목회자, 교인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연합기관의 사분오열 사태도 ‘지도자들의 문제’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교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적 수완이나 전직 경력이 화려한 정치꾼들과 노인들이 제일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교단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한 7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회의하고 밥먹고 모여서 한 일이 생산적이고 영향력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나 감투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패거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문제를 만들었고, 지도자들이 문제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교계 기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지도자는 연예인이 아니고, 지도력은 장식물이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 자체가 목적이지만, 지도자는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도력을 사용한다. 이런 지도력은 평상시에 단련돼 실전(實戰)에서 빛나고 결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 지도력이 장식물이 되면, 평상시 의전(儀典)에는 강해도 실전에서는 오합지졸 약한 군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전에 강한 군대의 의전은 소박하다.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지도자로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는 지도력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마음은 ‘연합기관’을 떠나 있는 듯하다. 분열과 갈등, 허송세월 10년이다. 이쯤되면 부부싸움에 집나간 자식 돌아오게 하듯 지도자들이 ‘연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연합하지 못하면 연합기관 간판내리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한목협의 성명처럼 ‘더 이상은 안된다’는 절박한 외침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겸허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살길이 있다. ‘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논의가 몇 년째 매주 기사화 된다. 교계 연합기관들을 언론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보도해 준다. 지리멸렬한 연합기관이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분열의 연장이었다. 이런 관심밖의 잊혀진 연합기관의 행사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다.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교회와 시대를 향한 고민과 걱정이 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자신들끼리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 '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이런 여러 연합기관들을 보면 20명 가까운 공동회장들이 60대 중반에서 70대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물러났거나 아니면 은퇴한 분들이 모여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올드하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인적 구성의 기구는 '연합운동은 늙은 정치꾼 올드보이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인상을 또 한 번 주게 된다. 이런 기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미 굳어버린 이런 경로당 이미지와 사고로 인해 그 폭(幅)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 차라리 저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기구를 운영하게 한다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어떤 기관의 대표회장은 소위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총회장과 대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총회장’이 직업이 되었다. 그 단체 구성원들도 그와 함께 덩달아 늙었고 수는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세상 흐름과 감각을 따라잡는 게 어려워진다. 아무리 명분이 뛰어나고 인품, 신망이 뛰어나도 조직이 망하면 그는 최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조금 젊다고 하는 60대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 사라진 골목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막상 본인들이 60대에 들어서면 매스컴에 소개되는 조직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주력한다. 정책이나 경륜과 상관없이 인물위주의 이벤트라는 이미 선배 ‘올드보이’들이 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또 다시 ‘올드보이’의 시대를 만든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장기적 정책 대안은 없이 1년직 자리나 인물중심의 ‘올드보이들’의 전성시대인가? 그래서인지 혼돈의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변화할 것인가? 변신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걱정을 한다면 정책 아젠다를 개발하고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 50대 대표, 40대 총무와 사무총장이라는 인적쇄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교단이든 기관이든 같은 자리를 세 번이상 역임했으면 그는 이미 원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은 또 다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아마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며 열을 많이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고(思考)의 올드보이’이다.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유연성도, 사회변화를 읽고 받아 드리는 수용성도 떨어지니 그것이 그 수준이자 한국교회의 한계이다.

신동식 목사2018-06-11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흔적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울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렇듯 흔적은 역사를 보여주고,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흔적에서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흔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때 소아시아와 헬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또 소아시아와 헬라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사도들이 가기 전에 복음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 후에 사도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선교사로 보냄을 받습니다. 땅끝까지 가라는 말씀을 따라 사도들은 복음을 들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에베소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빌라델비아·사데·두아디라·서머나·버가모교회 등이 터키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도시와 교회 터는 흔적만 있습니다. 골로새나. 서머나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데교회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 뒤에 허름한 작은 교회터로 흔적만 있습니다. 바울의 여정은 드고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오라는 말씀에 따라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지 않고 바다를 건너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 압비볼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주 장사 루디아를 첫 회심자로 얻습니다. 이렇게 유럽에 첫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압비볼리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피신합니다. 카산더 장군이 창건한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활력이 있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는 아주 조용한 도시입니다. 그 곳에서 말씀에 신실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베뢰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터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존재했던 유대인 회당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베뢰아를 지나서 아테네로 가고 고린도를 거쳐서 다시 가이샤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계속해 제자들을 돌아보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바울의 여정을 따라가면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물어진 건물만 유물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의 무상함도 아닙니다. 그 흔적에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바울과 제자들은 당시의 세계에서 맡겨진 최선을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고 떠났습니다. 지금은 이슬람 국가가 되어서 마음껏 예배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지만 흔적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찾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금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핍박과 고난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자 몸부림쳤던 선진들의 모습을 떠오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봅니다. 복음은 교회를 통해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교회의 흔적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흔적이 있습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형체도 알 수 없지만 복음을 듣고 찬양하며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사랑을 나눴던 옛 성도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를 봅니다. 이 교회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교회를 존속시키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여주봉 목사2018-06-05

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살펴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지금 한국교회에 제시하고 계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 교회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이다. 신약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 그것이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떤 외부적인 행동이기에 앞서 그 행동을 하는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잘 볼 수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핵심적인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강력하게 꾸짖으면서 한 말이다(11절).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14절), “외식했다.”(13절)고 말한다. 특히 사도 바울은 사도 베드로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16절).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였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잘 볼 수 있다(행 15:7-11). 그럼 무엇이 문제였는가? 사도 베드로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기독교인들이 오니까 그들이 두려워서 자리를 옮겨 유대인들끼리 따로 앉은 행동을 두고,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사도 베드로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럼 베드로는 항상 이방 기독교인들과 식사해야 했는가? 유대 기독교인들과만 따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면 안 되었는가? 아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베드로가 방금 취한 그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었다. 베드로가 취한 그 행동의 배후에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또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는 것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만든다는 가치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반영하는 가치관이었다. 그 결과 사도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었고, 또한 그것을 가르쳤지만, 베드로의 그 행동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반영하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타락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그렇게 강력하게 책망하되, 다른 말이 아닌 바로 16절의 말로 그를 책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고 그 반대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도 어떠한 외부적인 행동이기에 앞서, 그 행동을 하는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다. 갈라디아교회의 경우에도 문제는 할례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할례를 받은 그 배후에 있는 가치관에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할례의 위험성을 그렇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난 다음, 곧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갈 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정말 심각하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말로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정말 심각하게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그리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복음의 능력이 그토록 철저하게 소멸되어 있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정재영 교수2018-06-04

우리 사회에서 성 평등 문제 최근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관련 논의가 뜨겁게 번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성 평등 관련 이슈들이 제기되어 왔는데, 최근에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이른바 서초동 노래방 살인 사건이다. 2016년 5월 17일 새벽에 한 남성이 서울 서초동의 노래방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6명은 그냥 보낸 이후에 들어온 여성을 살해하여 이른바 ‘여성 혐오’가 크게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고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 평등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문화계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영화계, 정치계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성범죄 사건이 불거지며 큰 홍역을 앓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에서 성 문제는 여전히 수면 아래 머물고 있다. 본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종교는 권위적이고 특히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어렵다. 게다가 성 문제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 교회를 더 어렵게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쉬쉬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2중, 3중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알리기조차 어려웠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강자 중심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성 평등이 우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와 권리를 가져야 하나 실제로는 많은 교회들에서 남성 교인들이 지도력을 행사하고 여성 교인들은 부차적인 위치에 처해 온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인의 성 평등 의식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에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는 성 평등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개신교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정, 직장, 학교, 교회 중 가장 여성 불평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은 직장으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으로 가정, 학교, 교회 순으로 나타났다. 다른 영역들과 비교해서 교회에 대해서는 남녀 평등하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출석 교회에 대해서도 비슷하지만 약간 더 높은 비율로 평등하다고 응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 전래 초기부터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한국 교회가 다른 사회 영역에 비해 성 차별이 심하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우리 사회에서도 교회 안에서는 여성들도 상대적으로 많은 활동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집에서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로 불리는 것도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 안의 주요 직책이나 역할에서는 남성 교인보다 부차적인 위치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한국 교회의 신앙 활동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들의 차별이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교회 안에서 지위의 차이가 나는 경우 상위직을 차지하는 남성이 여성의 남편, 아버지, 형제라는 가족상의 지위와 연결돼서 지위에 따른 성차별 문제는 친족 관계로 환원되어 문제시되지 않는다. 보기를 들면, 여성 장로가 인정되지 않는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장로 부인’으로 불리는 것이 일종의 대리 만족을 주기 때문에 성 차별을 민감하게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 역할 실태에 대해서는 대체로 남녀 구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전통적으로 기능적 적합성이 다르다고 여기는 주차 봉사와 주방 봉사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예배에서의 역할은 사회나 기도 등에서 부분적으로 남성 교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여성 교인이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 역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든 영역에서 보다 남녀 구별 없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 교회 내 성 역할의 비 구분, 교회의 양성 평등에 대한 관심 증대에 대해서 매우 높은 동의율을 나타냈다. 목회자의 성별 역할에 대해서도 모든 항목에서 남녀 구분 없이 목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만 담임 목사에 대해서는 다른 항목에 비해 남성 목회자가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이 다소 높게 나와서 여성 담임 목사를 꺼리는 견해를 일부 나타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성 목회자들은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실정이고 담임 목회를 하는 경우는 거의 모두 본인이 개척한 경우이다. 곧 담임 목회자로 여성 목사를 청빙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할 정도이다. 성도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남녀 평등의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 목회자 설교 시 남녀 차별적 표현을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0% 미만으로 낮게 나왔다. 그러나 성 차별적인 보기를 제시하고 질문한 결과에서는 들어보았다는 긍정률이 30~40%대로 상대적으로 높게 나와서 실제로는 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내용이 성 차별적 발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앙 단계가 높은 그리스도 중심층에서는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 들어보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음에도 남녀 차별적 표현을 들었다는 응답은 가장 낮게 나와서 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성을 목사나 장로 안수에 대해서, 응답자의 2/3 이상이 찬성하였으며, 반대하는 비율은 10%를 넘지 않았다. 현재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단에서는 이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여성 장로의 비율은 10%에 이르지 못했는데, 적당한 여성 장로 비율은 평균 31.1%로 나와서 현재보다 3배 이상 많아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따라서 보다 많은 교회에서 여성 장로를 세워서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한 가지 특징은 신앙 단계가 높은 사람들,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신앙 단계가 높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전통적인 성 관념을 고수하고 있고, 성 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러 교계 조사에서 신앙심이 강할수록 더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일수록 성 불평등적인 사고를 나타냈으며 일부 항목에서는 보수성과 무관하게 신앙 단계가 높은 교인들이 더 성 불평등적인 사고를 나타내기도 하여 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성 평등한 교회를 위하여 성별 차이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여전히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들도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보다 성 평등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환경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공동체라고 한다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의 권리를 억압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전에 우리 사회에서 5만 원 권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신사임당을 정했을 때 여성계를 중심으로 강하게 반발한 적이 있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우리 역사에서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신사임당이 바람직하냐에 대한 문제 제기였던 것이다. 성 역할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데 이번 조사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인식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가정과 사회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갖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성 평등적인 사고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성 차별적인 언행이나 제도가 개선되고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구현되는 거룩한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명전 대표이사2018-06-01

미국 워싱턴의 대한제국공사관이 5월15일 복원을 완료하고 22일 개관했다. 개관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자주외교와 한미우호의 상징이며 기억해야 할 역사”라 했다.113년 만에 다시 태극기를 올렸다.일본이 나라를 강점한 후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단돈 5달러에 강탈한 주미 공사관이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건물 가액만 약 15억 원 수준이다. 문화 역사적 가치를 더하면 그 100배 도 넘는다. 일본의 침탈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이 널려 있다. 같은 날 일본정부는 ‘2018년 일본 외교청서’를 냈다. 한국의 외교백서에 해당하는 국가 문서로 국내외에 외교 현안과 성과 및 전략을 망라한 것이다. 한국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동해는 일본해”라는 주장이다.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한일관계에 대해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이다. 한국은 현안이 있을 때 협력하는 가벼운 이웃 국가라는 의미다. 일본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05년 공개된 미국 CIA의 한국전쟁관련 보고서다. 한국전 당시 일본주재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J. 시볼드의 기록이다. 시볼트는 “일본의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횡재(橫財:windfall)를 했다”고 썼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군과 유엔군은 전쟁물자와 각종 서비스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미군은 전투 중에 파괴된 차량과 무기 등 군수물자의 80% 이상을 일본에서 수리 제조했다. 당시 일본 내에 세워진 군수물자 생산 공장만 860개 소나 되었다. 한국전쟁 첫해 6개월 동안 일본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외화 수입의 15%를 차지했다. 자동차 등 전쟁물자 2억2천만 달러, 기지공사 등 용역 수익 9300만 달러를 비롯해 총 3억 1,500만 달러에 달한다(일본경제안정본부 통계). 한국전쟁이 일본에 안겨준 외화수익 비중은 1951년 GDP의 26.4%, 1952년 36.8%를 차지했을 정도다. 일본경제는 한국전쟁 3년 차인 1952년, 세계대전 패망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한국전쟁 혜택은 당시의 화폐가치로 약 10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은 자동차, 철강, 조선, 건설, 의약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견고한 성장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요타자동차는 1950년 파산 위기에서 살아난 기업이다. 1949년, 상용차 수출이 13대에 불과했다. 6·25가 발발하고 그 해에만 상용차 5502대를 수출하면서 파산을 면했다. 도요타 에이지 사장은 회고록 ‘결단’에서 한국전쟁 특수(特需)는 “구제의 신이나 다름없었다”고 썼다.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도 “일본을 위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기반으로 전후 20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 성장가도를 달렸다. 전쟁이 끝난 후 10년 간은 주로 전쟁복구 물자를 공급했고, 그후 10년은 한국 산업화를 시장으로 활용하며 성장했다. 일본은 현재도 한국이 유일하게 무역 적자를 보는 나라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역사의 고비마다 이어져 온 침탈과 지배, 약탈의 나라였다. 민족의 비극, 분단의 아픔도 그 근원은 국권의 강탈에서부터 유래한다.지금 이 순간도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한다. 섬나라, 기지국가 일본의 콤플렉스와 패전 전범국가의 트라우마를 모르는 바 아니다. 일본이 꿈꾸는 보통국가로 가는 좋은 길은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이 돕는다면… 한반도에 냉전과 휴전협정 체제를 마감하려는 대전환의 순간이 다가왔다.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은 남북한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다. 그 길은 70년의 전쟁체제를 마감하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끄는 동행 시대의 개막에 있다. 냉전구조가 해체되면 불행했던 식민지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남북 그리고 일본이 평화의 시대를 여는 주역이면 좋겠다. 사이 좋은 이웃 이길 소망한다. 그리고 나면 현해탄을 가로질러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연결되는 보통국가 일본의 길도 열릴 것이다. 한국은 일본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 역학 구도를 보면 한반도의 휴전협정 체제는 일본과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일본의 역할에 주목한다. 더불어 기지국가 일본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모색도 필요하다. 아베 총리가 전범국가 일본을 보통국가로 세우려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경계는 하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일본이 보통국가로 서는 것과 전쟁체제를 해체하는 것은 한일이 미래로 가는 하나의 길 위에 있다는 인식이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에 협력하고 평화국가로서 자리매김 하도록 돕는 것이다. 일본도 국내정치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한반도와 긴장을 조성하는 3류 정치를 끝내고 일류국가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중국, 러시아를 어떻게 대우할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명록에 썼던 ‘자주외교’의 길은 한반도의 평화체제에서만 명료하게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정국 선교사2018-05-23

세계인구가 72억을 넘어섰다. 이를 3등분하면 재미난 그림이 나온다. 3분의 1인 24억의 인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개신교(오순절교 포함) 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독립교회 그리고 사이비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3분의 1은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 근처에 사는 불신자들인데, 이들 눈에는 여러 종류의 기독 교회당이 쉽게 눈에 보이며, 친지와 친구, 사업 동료 중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전도를 받을 수 있는 전도대상자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1은 그들 주변에 교회나 교인이 잘 보이지 않거나 있어도 소수에 불과해 전도의 기회가 거의 없는 대상이어서 누군가 그들에게 문화와 언어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필요한 집단으로, 우리는 이들을 ‘미전도종족’이라 부르는데 보다 쉽게 말하자면 선교대상자들이다. “기독선교사들이여, 어디 있는가?” 1989년 (지금부터 30년 전) 서구 선교전략가들은 그들의 선교사가 너무 많이 전도대상자 속에서 사역함을 발견하고, 기존 선교사의 재배치를 강력히 추진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약 11년 후 2000년에 한인선교사의 배치를 조사한 리서치에서 한인선교사의 배치도 서구선교사 이상으로 전도대상자에 많이 배치돼 있어, 전략적 재배치, 전진배치를 주장했다. 이동휘 목사의 지휘 하에 있던 바울선교회 등이 이에 적극 호응해 필리핀 주재 선교사를 중동, 서부아프리카에 재배치시킨 일은 한국선교계 큰 도전이 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단과 선교회는 현지 선교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재배치 성과는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통계를 보니 6년 전 아시아 모국에 나간 선교사 수가 4,920여명 정도였는데 작년 말 통계가 3,900여명으로 준 것이 눈에 띄었다. 일부 선교사들이 그 나라에서 자진 재배치한 경우도 있었지만 현지 당국의 강압으로 강제 출국 한 경우가 상당했다. 참새 한 마리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이뤄지는데, 그분의 선교동역자들의 강제 출국사건은 하나님의 또 다른 재배치 전략임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 서 있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곳을 가끔 돌아볼 때가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선교대상지역인가 아니면 전도대상지역인지를 살펴보자. 선교사는 그런 점에서 선교대상자를 향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토드 존스 박사는 21세기 들어 그가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끔찍한 통계를 우리에게 제시한 바 있다. 즉 “세계 선교사 중 순수한 미전도종족 즉 선교대상 종족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가 오직 3%에 블과하고, 나머지 97%는 전도대상에서 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나 끔찍한 통계이다. 우리는 이제 전도대상자에서 일하는 선교사를 향하여 “거기에 더 이상 서 있지 말고, 선교대상자에게로 가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는 이를 잘 생각하여 선교사의 전략적 배치를 유도해야 한다. 요즘은 세계기도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여러분의 선교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로마 가톨릭교 성도나 정교회 신자 전체를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로 치부하는 그 셈법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들 숫자의 4분의 1만이라도 복음을 들었다고 간주하면 어떨까? 그 4분의 1이 꼭 거듭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적어도 복음을 접촉하고 있는 이들이 아닐까? 4분의 3은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처럼 간주해도 좋다. 그렇게 계산해보면 우리가 보낸 선교사들이 서 있어야 할 데가 자연스럽게 도출이 된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는 미전도종족이 4,700개나 존재하며 그들 속에는 선교사가 거의 없다. 그 많은 한인선교사는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우리의 선교대상은 복음의 미개척지역이나 미전도종족 그리고 비복음화 영역으로 설정해 한인선교사들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최후의 개척자들이 돼야 한다. 한국 선교계는 Target 2030마스터플랜(2030년까지 미래선교계획)을 세워 한인선교사의 전략적 배치를 돕고 있다. 현재 한인선교사는 이러한 전방선교대상보다 전도대상인 일반 선교대상에 너무 많이 포진돼 있다. 전방에는 선교사가 턱없이 부족한데, 전도대상자들을 위한 선교사는 너무 많고 그 길은 넓고 찾는 신임선교사도 많다. 주님께 물어보라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을 기존 선교사 그리고 선교사 파송 교회에 드리는 바이다.

이정기 목사2018-05-16

요즘 갑질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다. 그리고 미투 운동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이전에는 없다가 갑자기 문제가 많이 생긴 건가? 아니다. 이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계속 갑에게 억압되어 있었다. ‘너 하나 입다물면 모두가 편안해’ 집단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음지에 있던 분들이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있다. 그러나 갑은 언제나 갑이 아니다. 갑 위에 또 갑이 있어 갑과 을의 위치는 늘 바뀐다. 대통령이 그 나라에서는 갑인 것 같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경찰이 죄인 앞에서는 갑이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그러고 보면 국민이라는 이름은 민주사회에서는 영원한 갑인 것 같은데, 가난한 사람은 돈 있는 사람 앞에서 을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갑이고 누구나 을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에서는 상점에서 고객이 소리를 높이면 그때부터 상대를 안 한다. 계속 방해하면 경찰을 부른다. 경찰이나 공무원을 상대로 업무를 방해하는 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인식한다. 일본은 가난해도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천대하지 않는다. 미국은 돈이 많아도 안 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국은 부자들에게 가장 편한 국가이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갑질하는 사회는 후진사회이다. 이러한 후진성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가치관, 사회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품격이 되는 저질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불러온 병폐이다. 성경에도 갑질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요셉을 노예로 판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도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자 성폭행 미수범으로 몰아 감옥에 갇히게 한다. 사울왕도 다윗에게 갑질을 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환호에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윗도 왕이 되어 갑질을 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인 것을 알면서도 범한다. 아이가 생기자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급기야는 우리야를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한다. 라반도 야곱에게 갑질을 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에게 7년을 섬긴다. 첫날밤을 치른 야곱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 곁에 있는 여인이 레아임을 알았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봉사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일 시키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자기 마음대로 변경했다. <창31:7> 노동력 착취였다. 인간의 숨길 수 없는 '갑질 본능'이 라반에게도 있었다. 라반이 처음부터 야곱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카를 수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라반은 먼데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라반인지도 모른다. 갑의 권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위, 아래가 있다. 위계 질서가 있다. 그 위계 질서가 무너지면 안 된다. 성경에도 분명히 사람간에 계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신 28:13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으며, 위가 있고 아래가 있다. 그러므로 갑질과 갑의 권리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제품에 하자가 있어 컴플레인을 거는 것이 갑질인가? 그것은 갑의 권리이다. 마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주인은 이윤을 남긴 두 달란트 받은 종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한다. 그런데 땅에 감추었다가 가지고 온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있는 것 까지 빼앗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한다. 이것은 갑질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이다. 식당을 하시는 분은 갑인 고객의 불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야곱이 성공한 것은 라반의 갑질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셉이 성공 것도 형들과 주인의 아내의 갑질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 부모는 자녀의 최고의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부모를 통해 배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을 분노로 들썩이게 만들고 있는 세 모녀의 갑질을 보면서 '그 어미에 그 자식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소리지르는 것, 욕하는 것 똑같았다. 갑질의 대물림이었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칭찬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배려가 몸에 밴 국민성 때문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당시에 최고 갑질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한다. 토색한 것 4배로 갚아주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갑질하던 사람이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 후 삭개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 있는 사람이 더 겸손한 인격을 가져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공식이 깨져야 갑질도 멈출 것 같다. 갑질이 아닌 배려가 가득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명전 대표이사2018-05-11

4·27, 남북정상의 '판문점 선언'은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예고한다. '평화와 번영'의 미래다. 국제정치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서는 순간 시작된다. 국경과 전선(戰線)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불가분 관계에 있는 중국, 러시아, 일본과는 새로운 호혜협력의 질서를 세워 가게 된다. 냉전의 유산인 이념적 진영 논리가 힘을 쓸 수 없다. 이 같은 질서는 국내 정치에도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대결구도가 사라졌다고 완전한 무풍지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달라진 점은 남과 북이 운명공동체로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국경은 지도에 그려진 대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바다를 맞대고 있는 일본이다. 이 틈새에서 어떻게 평화와 번영의 생존전략을 펼쳐야 할까? 번영은 경제와 직결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번영으로 가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4·27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한 USB에 담아 준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그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한반도에 3대 경제벨트를 설정하고 동서와 허리를 잇는 H자형 개발 구상이라고 한다. 동쪽은 금강산-원산·단천-청진·나선을 연결축으로 한다. 북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남한의 동해안과 연결된다. ‘동해권 에너지·자원벨트’다. 서쪽은 수도권-개성-평양·남포-신의주를 축으로 한다. 북으로는 중국과 연결되고 남쪽은 서울과 서해안을 연결한다. ‘서해안 산업·물류·교통벨트’다. 동서를 잇는 경제지도는 ‘DMZ(비무장지대) 환경·관광벨트’다. 기타 남북접경지역에 '통일경제특구'를 지정해 개발하는 등 로드맵이다. 북한 번영의 로드맵은 무엇일까? 북한은 1990년대 식량난으로 공산주의식 배급과 보급체제가 붕괴 되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수단으로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장마당(시장)을 열었다. 자연발생적인 식량과 생필품 조달 통로다. 현재 북한에 500여 개의 장마당이 운영되고 있다. 가구 소득의 70% 이상이 장마당 시장경제에서 나온다. 장마당 경제는 중국 등 해외교역으로 확대되었다. 2013년의 북한 경제는 GDP의 약 46%를 대외교역에서 창출했다. 경제가 성장 기조로 돌아 선 2013년 '핵·경제 병진' 노선을 택했다. 경제력을 핵개발에 집중했다. 2016년 핵개발 완성단계에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수립한다. 그 해 GDP 3.9% 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에는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으로 강화했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북한의 ‘경제건설총력집중’ 노선은 위기다. 핵개발에 따른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교역봉쇄로 경제가 붕괴 직전이다. 경제봉쇄가 풀리지 않는 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시장경제로 진입한 북한 주민의 삶을 과거의 배급체제로 되돌릴 수도 없다. 이 시점에서 핵을 포기하고 번영을 택한 김정은의 선택은 최상이다. 북미회담은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여는 장이 될 것이다.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은 국경과 전선이 바뀌는 날이다. 전쟁과 분단 시대의 마감, 길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 길은 ‘한반도 신경제지도’에 있다. 보다 상세한 발전 전략은 남북이 함께 그려가야 한다. 이 국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지렛대이다. 다행스럽게 미국이라는 레버리지를 가졌다.

신동식 목사2018-05-10

지난한포럼에서있었던일입니다.강의가끝난후에질문시간이있었습니다.한청년이 심각한표정으로도피성도가가운데직분자들의자녀들이많은데이들이왜이렇게됐는지그리고어떻게대처해야하는지에대해질문했습니다.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의외로많은수의직분자의자녀들이교회로부터도피한 상태로살고있어교회의 시험거리가 되기때문입니다.언젠가는돌아오겠지하는심정으로기다리는부모들의마음이타들어가는것과별개로믿음이연약한이들이받는시험은만만치않기때문입니다. 이러한현실을어떻게이해해야합니까?신앙은개인적인것으로무시해야합니까?아니면 그 자녀들을 하나님이크게 사용하시려고시련을주시는것일까요?아마도이렇게생각하고싶을것입니다.그러나그렇게여유있게생각할것은아니라고생각합니다. 한예로불신가정에서태어나 예수님을 믿은성도들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늦게예수님을알았기때문에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가정을세우고싶을텐데직분자의자녀들의모습을 볼때그실망은적지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모든직분자의자녀들은다건강한신앙을가져야합니까?꼭그렇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비록 경건한가정에서도예수님의원수가나올수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 늦게믿은 분들이나,혹은홀로믿음을가진학생이나,청년들이큰시험에들필요는없습니다.그러면자녀에대해부모는손을놓고하나님에게만맡겨야하는것입니까? 그것은성경이가르치는것이아닙니다.왜냐하면성경은자녀에대한부모의책임을엄중하게말하고 있습니다. 아예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말씀을가르치라고했습니다.주의교훈과훈계로 양육하라고했습니다.그러므로자녀에대한부모의책임을피할수없습니다. 그렇다면직분자의자녀들의도피성도의삶을사는이유는무엇일까요그원인을살펴보는 것이필요합니다.우선전제하는것은도피성도로살고있는이들의가정상황을모릅니다. 그러나그결과를통해유추해생각하고자합니다.복된가정에서태어나교회를세우는 영광스러운삶을사는부모밑에서도피성도가나온다는것은너무나슬픈일입니다.그러나현실에는 이런도피성도들이많이있습니다.왜이들은도피성도가됐을까요?혹은 교회에있으나믿음이없는명목상그리스도인으로살까요?그이유를하나씩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부모가명목상그리스도인일가능성이있습니다. 직분자라고해서다거듭난그리스도인이라말할수가없습니다.누구든지사람을얼마든지 속일수가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속이지못하는사람들이있습니다.바로자신과가족입니다,특별히자녀들은부모의신앙을잘알고있습니다.진심으로예수님을믿고있는지압니다.그래서판단하는것입니다. 한예로시험때는예배보다는공부하고,교회보다는학원가라고 권유하는 부모를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부모도믿지않는예수님을자녀들이믿으려고 하겠습니까?물론 그런부모밑에서회심한자녀가나올수있습니다.그것은참으로놀라운하나님의은혜입니다. 그러나일반적으로도피성도들이즐비할것입니다. 둘째부모가이원론적신앙을가지고있을수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제일가슴아픈것은 크리스천 부모의세속화된신앙입니다.신앙의목적이철저하게세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과평일이다른삶을살아갑니다.교회와가정의모습이다릅니다.경건의모습도환경에따라바뀝니다. 특히 자녀들의 눈에 비치는 직장에서의모습과가정에서의모습과교회에서의모습이다다른카멜레온신앙입니다.그러다보니신앙은자신의세속적성공이나혹은삶의스트레스를 해소하기위한도구가될때가있습니다.자녀들은그러한부모의모습을잘알고있습니다.그리고발언할나이가되면부모의이원론에반기를듭니다,도피성도의삶이싹트는 것입니다. 셋째부모가영적인권위를가지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의 자녀들에게있어서부모는 단지밥해주고용돈을주는존재가되어서안됩니다.그렇게해도 관계는아름답습니다.인간이가지고있는기본적인효심이작동하기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환경적조건이주어졌을 때만유효합니다.이것이타락한인간의한계입니다.더구나신앙의가정에서자라난자녀들은철저하게부모의신앙과삶을통해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형성합니다. 그런데부모가영적인권위가없다면어떻게되겠습니까?특히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요구되는것은경건의 능력입니다.이것이영적인권위를갖게합니다.부모가 자신의 믿음 안에서 말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살려고몸부림치는정직한모습이자녀에게는영적인권위를갖게합니다.그런데 기본적으로부모가말씀을읽지않고,기도하지않는데 자녀가 말씀안에서자라기를바라는것은부끄러움입니다. 넷째부모가예수님의사랑을나누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자녀는부모의사랑을먹고자랍니다.그래서사랑을많이받은사람이건강합니다.반면에 사랑이궁핍하면성격에 모가나고삶이건강하지못합니다.그래서자녀는부모로부터충만한사랑을받아야합니다. 그런데부모가예수님께로부터받은사랑을자녀에게충만하게 나눠주지못하면자녀는예수님의사랑을힘들게알아갑니다.예수님께받은사랑이적으면 자녀들은더큰사랑을찾아떠나갑니다,그것이세상이주는즐거움에빠져 들어가는시작이됩니다.부모는자신이 삼위하나님께받은사랑을아낌없이주어야합니다.그러면자녀들이하나님을아낌없이 사랑합니다. 다섯째부모가가정과자녀에대한책임을감당하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영적인부모가영적인역할에있어서최선을다하는것은너무나당연한일입니다.또한 일반적인 삶에대한책임도최선을다해감당해야합니다. 자신은감당하지못하면서 단지부모라는이유로자녀들의공경을요구하는것은창피한일입니다.믿는부모는더열심히자신의삶을가꿔야합니다,그래서배나땀을흘리는일이 필요합니다.부모는부지런하면서지혜롭고규모가있어야합니다,특별히부부로서의정절과예의가있어야합니다.남편이가진책임과아내가가진책임을잘감당하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모릅니다. 이것은자녀들의삶에잘반사됩니다. 여섯째부모가자녀들의정직한질문에정직한답변을주는것을무시했을수있기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이것은정말중요하지만가장많이간과되고있는부분입니다.자녀들은부모의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에모든것을집중합니다.자녀가질문한다는것은 영적인권위를 인정하는것입니다. 이때 정직한답변을주려는열심히있어야합니다.그런데힘들고피곤하고잘모르겠다는이유로회피해버린다든지혹은화를낸다면그것은아이를지옥에던지는것과같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무분별한질문을잘요리할수있어야하지만정직한질문을기쁘게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힘을다해답을주려고한다면자녀는건강한신앙인으로자랄수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믿음의가정에서태어난자녀들이도피성도나명목상그리스도인으로살아가는것에는일차적으로부모들이감당해야할책임을방기했기때문입니다.특별히이모든 원인의시작이되는가정예배를포기했기때문입니다. 가정예배는그리스도의자녀로 자라나게하는일에있어서가장기초적인일입니다.더구나 부모가마땅히해야할책무입니다.가정예배를포기하는것은어쩌면부모되기를포기하는것과같습니다. 아마도 성도의 부모가자녀들의공부에대해갖는관심에10분의 1만 가정예배에대해가지면 그결과는 참으로놀라울것입니다.자녀들의세상성공에대해목말라 하면서자녀들의영적인회심과성숙에관심이없다면믿음이없기때문입니다. 자녀를맡은청지기로서의부모가최상의할일은바로가정예배를시작하는것입니다.일주일에한 번이라도해야합니다.가정예배없이자녀를위한기도는대부분건강과세상 성공일것입니다.그러나가정예배를드리면자녀를위한바른기도를할수있습니다.바로자녀의회심과영적인성숙입니다.우선순위가바뀌게되고진정으로사랑하게됩니다. 하나님앞에부끄럽지않으려면가정예배를드려야합니다.자녀들이미래의도피성도가 되는것을예방하려면가정예배를드려야합니다.결코포기해서는안됩니다.가정예배를 멈췄다면 다시시작하시기바랍니다.일주일에한번이라도해야합니다.특별히자녀가어리다면그 무엇과도바꿀없는것이바로가정예배입니다.가정예배가복의근원이며,통로입니다.

한정국 선교사2018-05-09

필자는 한국 본부 사역자로 선교지를 방문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교단선교부 총무시절 교단 선교사 한 분이 러시아 이르쿠츠크시의 한 개신교회 목사와 동역하고 있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루는 어느 곳을 가다가 차 운전을 하는 목사님께 “어떻게 목사가 되셨는가?”라고 물었더니, 자신은 정교회 신도였는데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고 런던에 신학 유학해 개신교 목사가 됐다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우리가 천국가면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 분은 씩 웃으면서 “아마 많은 정교회 신자들을 만나 보게 될 겁니다”라고 하여 놀랍기도 하고, 그 이유를 묻자 “예수 고백에 관한 교리가 우선 같고, 구원의 확신이 정교회 성도에겐 좀 부족하지만, 주 예수를 믿는 그들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저의 은사 전호진 박사가 정교회 교리를 연구한 뒤, “개신교와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가까운 편이다”라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러시아선교의 허와 실 1980년대 말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가 선교에 개방됐을 때 한인선교사들은 모스크바에 물밀 듯이 입성했다. 심지어 한국의 인기 강사 조용기 목사를 초청, 붉은 광장에서 대형 전도 집회를 거행했다. 단상에 선 조용기 목사는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좋았는데 그만 실언하고 말았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이 러시아 기독 사회에 큰 반발을 초래했다. 아마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오순절 선교사의 그릇된 정보 또는 편견에 찬 오만한 정보가 그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것이다. 1995년 모스크바에만 한국인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는 신학교가 5개였고, 5년 후 2000년에는 10개가 됐다고 두 차례 방문한 전호진 목사가 한탄한 바 있다. “한 목사, 그래도 내가 신학교에 전문가인데, 한인선교사들이 신학교 운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애. 아니 중복 투자도 심각할 걸. 한 교단에서 나온 두 선교사가 따로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니 나 원 참”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2010년 쯤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그 10개 신학교의 대부분이 문을 닫고 오직 2개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 2개마저 잘 운영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씁쓸해진다. 신학을 하는 이들의 속 좁은 마음과 독선이 무섭다. 2년 전 연해주 수도인 하바롭스크를 방문해 선교사 전체를 초청, 저녁을 함께 한 바 있다. 4개 신학교가 있었던 곳 이었다. 15년 된 한 선교사가 나에게 “그 4개 신학교가 다 사라졌어요. 한인선교사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전혀 없다”면서 혀를 찼다. 무슨 확신이 그들에게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고, 무슨 일로 쉽게 이를 포기했는가? 예수교회 또는 우리교단교회? 선교지마다 한인선교사들은 많은 장학금 또는 용돈까지 주면서 현지인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이 삯꾼이 되기를 바라는 선교사는 한 명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 운영 방식을 보면 이 가운데 많은 삯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선교역사적인 면에서 즉 comity(예의와 양보 정신)제도로 인해, 지역 분할로 인해 감리교단은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전담지역에 집중 선교해 그 지역에는 감리교단 교회가 열심히 사역한 결과 지금은 큰 교회가 많다. 말레이시아가 그런 경우로 그곳엔 큰 김리교회가 많다. 화융 목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감리교 목회자이다. 그러나 후에 들어간 한인선교사들은 역사의 이런 아름다운 예의와 양보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버리고 그들의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이 졸업해 그들의 교단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예수의 교회를 심는 예수 선교사라기보다 교단선교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나 속 좁게 살아왔다. 아니 갈기갈기 나눠져서 신학교에서 교수들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무엇이 같은지를 깊이 연구 않고, 조그만 교리라도 다르니 서로 교류를 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00여 개 넘고 있는데서 나온 한 장로교 목사선교사로서 내가 속한 교단의 파란만장한 이합 집단을 보면서 나는 선교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해본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역사적으로 생성된 수많은 기독교 형식을 참조하되, 그들 현지 기독교인에 적합한 기독교를 만들도록 해아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찰스 크레프트는 이것을 ‘적합한 기독교’라고 명명한바 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세례, 한 성령을 믿는다. 다만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여러 기독교의 모습을 갖고 한 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계7:9-10의 그림이 이런 우리 기독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정재영 교수2018-05-09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면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통일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0년 가까이 남북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고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조치로 경제 재제까지 이루어지면서 통일이나 평화 정책은 먼 얘기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실시된 통일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남북한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7.8%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은 2016년 대비 4.3%, 2014년 대비 11.5% 하락한 수치이다. 그런데 북한 정상이 최초로 남한 땅을 밟고 들어와서 남한의 대통령과 평화 정착에 대한 진일보한 구상들을 밝힌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면서 오히려 한반도 통일이 성큼 다가온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통일을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통일 이후 과정에 대한 대비이다. 통일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나 이제까지 통일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권이 하나됨을 의미하는 정치 차원의 통합, 화폐 및 산업 구조가 단일화되는 경제 차원의 통합에 집중되어 왔다. 정치나 경제 차원에서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통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포함한 사회 차원의 통합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외형상으로 하나의 체제를 갖는다고 해서 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의 이념을 가진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 통합 또는 사회 통합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통일 ‘이후’가 중요한 것은 통일의 ‘과정’이 통일 ‘이후’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 후에 일어날 사회 통합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는 통일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통일 후 사회 통합의 문제를 고려하여 ‘선 통일, 후 통합’이 아니라 ‘선 통합 후 통일’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사회 통합이라고 하는 것이 5년 또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통일 후 사회 통합의 문제에 대해서는 장기간의 안목으로 대비해야 한다. 특히 독일의 경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회 통합의 측면을 염두에 두고 통일을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을 보았을 때 사회 통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회통합 관점에서 보는 통일 통일은 두 체제의 통합이지만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동일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두 체제가 통합된 사회에 살게 될 때에는 이전에 삶을 지탱해 주던 규범들이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사회학자인 뒤르케임이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목격했던 서구 사회의 아노미(무규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뒤르케임이 사회 구조가 변한 현대의 상황을, 옛 가치와 규범과 제도가 내몰린 그 자리에 아직 새 가치와 규범과 제도를 채 들여다 놓지 못한 도덕적 진공 상태가 가지는 도덕적 문제로 본 것 같이, 통일된 이후의 사회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과 제도가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심각한 도덕적 위기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규범이나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독일처럼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사회 통합은 우리들에게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통일 후’ 전개돼야 할 재사회화를 통한 사회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환경으로서의 ‘통일 후’의 시기에 이루어질 각 개인들의 재사회화가 완성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사회화의 과정에서 가장 효과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공동체라고 하는 준거집단의 제공인데, 그것은 공동체의 형성이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이라고 하는 재사회화의 장으로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 공동체 중의 하나인 교회가 가지는 사회통합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 사회 통합을 위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이다. 교회와 남북한 사회의 통합에 대한 연구들은 흔히 남북한 기독교 사이의 교류에 주목하면서 기독교간 교류가 증대되면 자연히 이질화가 약화되어 남북 기독교간에 통합을 이루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하여 사회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런 주장에서는 대부분 ‘사회’를 정치와 경제, 또는 (좁은 의미의 문화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는) 문화와 구분되는 일반인 또는 서민의 영역이라는 매우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사회 영역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은 보다 근본을 이루는 뜻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규범 및 가치와 관련된 의미 체계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일 후 교회의 역할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의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의 역할, 그 중에서도 종교 단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사회 통합의 정치 제도나 경제 체제와 같은 체계상의 통합이 아니라 생활 세계 또는 시민 사회 영역에서의 통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는 종교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통일 이전에는 동독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동독과 서독 지역의 교회들이 통일 이후에는 그러한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통일이 되자 동독 지역의 교회들이 더 이상 서독 지역 교회들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서독 지역 교회들과의 관계를 끊었고, 정부 차원의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교회의 역할이 줄어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회 통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단순히 분단된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의 교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통합은 단순히 동질성을 회복하거나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이질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러한 가치에 의한 재사회화를 하는 것이 통일 후 사회 통합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독일 통일과 통일 이후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몰트만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회가 일자리 없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는 시장경제가 줄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주는 곳이지요. 공산주의 국가들은 평등은 있지만 자유가 없고 서구에서는 자유는 있지만 평등은 없는 상황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연결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그 영향력이 단순히 종교단체의 하나로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 영역 전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 사상과 관행을 더욱 계발시키고 그것을 통일 한국의 사회 구성 원리로 제시해 그에 근거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현존의 가치를 초월해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및 규범이 통일된 국가의 가치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면서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의 가치, 신학이나 신앙의 표현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성서의 원리로 한민족 전체를 묶어 줄 수 있는 공통의 가치 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두 사회의 구성원들의 감성을 담아 표현하는 데 걸림이 없는 새로운 언어가 창조돼야 한다. 이럴 때라야 한국의 기독교는 진정으로 한국인들의 심성과 습속 깊이 자리 잡아 결속시키는 하나의 ‘시민 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주봉 목사2018-05-04

나는이사야하반부에나오는신약의교회에주신하나님의놀라운유업들에대해나누고있다. 나는하나님께서오늘날이유업들을한국교회에제시하고(offer) 확신한다. 그유업들은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에주어진유업들이다. 그리고하나님께서의도하신신약교회는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위에세워진교회이다. 신약교회의기초가예수그리스도라는말속에는예수님이우리의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시는삶이포함되어있다. 예수님이우리의의로움이되시는삶, 그것이다른말로믿음으로말미암는의이다. 문제는예수님이우리의의로움이되시려면, 우리가육체를신뢰하는것을철저하게버려야한다. 우리는앞에서초대교회할례의문제를가지고이부분을살펴보았다. 예수님을믿는믿음에다할례를더한것이거짓복음이라고말하면, 어떤성도들은오늘날우리는할례를받지않는데그것이우리와무슨상관이냐라고반문한다. 그리고그들은그것은초대교회의문제이지, 오늘날우리들과는아무런상관도없는일이라고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그들은빌립보서3장을읽으면서도, 오늘날우리가운데너무나팽배한, 육신을의지하는거짓복음의영향력을전혀인식하지못한다. 육체를의지하는것은다양한형태를띨수있다. 사도바울은빌립보서3:4부터그의그화려한종교적인배경과경력을나열한다. “5나는팔일만에할례를받고이스라엘족속이요베냐민지파요히브리인중의히브리인이요율법으로는바리새인이요6열심으로는교회를박해하고율법의의로는흠이없는자라”(빌3:5-6). 그것들은그당시종교사회에서참으로인정받을수있는것들이었다. 그당시웬만한배경과경력을자랑하는자들에게바울의그것들을제시하면그들은곧바로고개를떨굴정도였다. 그런데사도바울은그의그화려한배경과경력을나열하면서, 그것들을육체라고부르고있다. “그러나나도육체를신뢰할만하며만일누구든지다른이가육체를신뢰할것이있는줄로생각하면나는더욱그러하리니”(빌3:4). 이처럼육체를의지하는것은단순히할례의문제만이아니다. 육체가될수있는것들은우리의삶에서참으로다양하다. 심지어우리신앙생활에서중요한요소들도육체가될수있습니다(골2:16-17). 그래서그것이무엇이든지우리가육체를신뢰하면, 다시말해서육체로인하여자부심을가지면, 그것이거짓복음입니다. 거짓복음, 율법주의신앙을간단히표현하면다음과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육체=거짓복음, 율법주의. 예수님을의지하려면육체를신뢰하는것을철저하게버려야한다. 사도바울은그것을배설물로여겼다고표현하고있다. 그는그의배경과경력을나열하고난다음, 다음과같이말한다. “7그러나무엇이든지내게유익하던것을내가그리스도를위하여다해로여길뿐더러8또한모든것을해로여김은내주그리스도예수를아는지식이가장고상하기때문이라내가그를위하여모든것을잃어버리고배설물로여김은그리스도를얻고9그안에서발견되려함이니내가가진의는율법에서난것이아니요오직그리스도를믿음으로말미암은것이니곧믿음으로하나님께로부터난의라”(빌3:7-9). 그렇다. 우리가육신을의지하는것이배설물이되어질때에비로소예수님이우리의의가되시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진정한의미에서우리가예수님을의지하는것이다. 이부분을잘볼수있는한부정적인예가예레미야시대이다. 지금까지살펴본것을잘이해하고이제고린도전서1:30로다시돌아가보자. 사도바울은예수님이우리에게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셨다고말하면서, 그것이(구약)성경에예언된대로그렇게되었다고말한다. “30너희는하나님으로부터나서그리스도예수안에있고예수는하나님으로부터나와서우리에게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셨으니31기록된바자랑하는자는주안에서자랑하라함과같게하려함이라”(고전1:30-31). 사도바울이인용하고있는성경구절은예레미야9:24이다. “자랑하는자는이것으로자랑할지니곧명철하여나를아는것과나여호와는사랑과정의와공의를땅에행하는자인줄깨닫는것이라나는이일을기뻐하노라여호와의말씀이니라.” 예레미야시대유다백성들은시바에서나는특별한향품을가져다가하나님께번제를드릴만큼그들의희생은뛰어났다(렘6:20). 또한그들은입만벌리면하나님이야기를할만큼그들의입술에는항상하나님이있었다. 예레미야12:2의“그들의입은주께가까우나”를영어NIV 성경은“You are always on their lips(당신이항상저들의입술에있습니다)”로번역하고있다. 그러한그들에게예레미야는“하나님을자랑하라”고외쳤다. 그예레미야의메시지를들은그당시유다백성들은자신들에대해서어떻게생각했을까? 당연히그들은자신들이야말로누구보다더하나님을자랑하고있다고자부했을것이다. (참고로고린도전서1:31과예레미야9:24을보아도하나님을자랑하는것과하나님을신뢰하는것은같은의미이다.) 그래서하나님께서예레미야를통해서아무리그들에게외쳐봐야그것이그들에게아무런효력도없었다. 문제는바로그앞절에있다. “여호와께서이와같이말씀하시되지혜로운자는그의지혜를자랑하지말라용사는그의용맹을자랑하지말라부자는그의부함을자랑하지말라.”(렘9:23). 지혜로운자가그지혜로인한자부심이사도바울의경우처럼배설물이될때에야비로소그에게는하나님이자랑이되는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는진정한의미에서하나님을신뢰하는것이다. 마찬가지로부자가부로인한자부심이배설물이될때에도비로소그는하나님을진정으로신뢰하는것이다. 만약예레미야시대유다백성들이그렇게하나님을올바로신뢰했더라면, 그들을그당시하나님의심판을받아나라가망하지않았을것이다. 그들은당연히하나님안에서복된삶을살았을것이다. 그러나그들은하나님앞에서철저하게타락한육신을신뢰하는삶을살고있으면서, 하나님께서예레미야를통해서그들에게하나님을자랑하라고목이터지라고외치는소리를듣고도, 그말의진정한의미를전혀몰랐기때문에전혀돌이키지않았다. 오늘날우리는모두믿음으로말미암는의를말한다. 그러나오늘날성도들과교회의삶가운데육체로자부심이하늘을찌른다. 그결과교회안에십자가복음의내용과교리는있을지모르지만, 그능력은철저하게소멸되어있다. 그러면서도대부분의성도들은예레미야시대의유다백성들처럼자신들이잘못되어있다는사실도전혀깨닫지못하고있다. 그말의진정한의미를모르기때문이다.

이정기 목사2018-04-27

하이포니카 농법을 아는가? 식물이 흙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그래서 흙이라는 장애를 제거해 주고 태양의 힘과 영양분을 가지고 있는 물로 자라게 하는 소위 수경재배법이다. 토마토는 보통 한 그루에 20-30개 정도의 열매가 열리는데 이 하이포니카 농법을 사용하면 1만 3천개의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바이오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냥 흙이라는 장애를 제거해 주고, 물속에 영양분을 넣어 주고, 태양과 공기를 제공한 것 뿐이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 장애를 제거해 주면 백배 천배까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갤럽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반인 4명 중 1명은 자신이 심각하게 우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 더 많았다. 여성에게 우울증이 많은 이유는 생물학적 요소로, 남녀간의 뇌의 구조적 차이와 호르몬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미투 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눌려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연일 과거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과오의 민낯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트라우마의 고통을 극복하는데 있어 자신이 숨겨왔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은 필수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부당함을 밝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 격려와 공감과 위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두렵고도 강렬한 경험은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여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교감 신경의 스위치가 쉽게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난방기의 온도를 조절하는 조절계가 고장이라도 난 듯이, 늘 긴장되고 각성한 상태가 유지 된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다행히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 그런 분들이 이젠 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셨으면 좋겠다. 정신적 장애를 제거하고 밝은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에게도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 다윗이 등장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때였다.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골리앗의 키는 3m 가까이 되었고, 갑옷의 무게만도 60kg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그 누구도 골리앗과 맞서 싸울 상대가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싸우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무찌른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며 환영하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노래한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이 불쾌해 하며 심히 노한다.<삼상18:8> 문제의 핵심은 비교 때문이었다. 사울은 상황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다윗이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주었는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정말 고마운 부하였다. 다윗을 잘만 활용하면 왕권을 더욱 든든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무섭게 시기한다. 그러면서 다윗을 사위로 삼는다. 다윗이 예뻐서가 아니고 다윗을 가까이 두었다가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만큼 사울의 정신적 장애는 심각했다. 사울은 마침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진다. 결국 사울은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요셉을 보라. 자기에게 닥친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다. 형들에 의해 팔려가 종살이할 때도,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형들앞에서 한 말을 들어 보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미움의 감정을 품고 복수의 칼날을 갈으며 정신적인 장애를 안고 살았다면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에서 해방되었기에 백배 천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매사를 삐뚤어지게 바라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좋은 쪽 보다는 안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닥친 일도 아닌데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찾아 헐뜯고 비방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병들어서 그런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일어난 사건을 무조건 좋게 해석하라.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러므로 안된다는 생각을 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자. 끝났다는 생각을 이제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제 좋은 것만 보려고 애쓰자. 좋게 보려고 애쓰자. 정신적인 장애를 제거하고, 항상 믿음으로 긍정을 선택하고, 백배 천배의 능력을 발휘하며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자.

이인현(GOODTV 문화예술전문위원)2018-04-20

필자는 최악의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베토벤을 생각할 때면 경이롭다는 단어 외에 떠오르는 말이 달리 없다. 피아니스트인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함에 있어서 청력의 의존도는 가히 절대적이다. 베토벤은 한창 잘 나가던 20대에 청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믿을만한 강력한 무기가 사라진다면, 누가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청력이 점점 나빠지자 베토벤은 음악가의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에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를 쓴다. 그러나 그는 유서를 써 내려가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게 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청력 상실이 진행될수록 그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교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특히 셰익스피어나 칸트, 괴테, 쉴러 등 인문학과 철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내면에 집중할수록 그의 음악도 더욱 진지하고 깊어져 갔다. 그는 더 이상 웃고 떠드는 유흥의 음악이 아닌 삶을 돌아보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큰 울림을 주는 음악을 창작하기에 주력했다. 베토벤은 비로소 음악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청력 상실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자연을 소리로 표현했으며, 풍경을 묘사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음악에 담아내었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 인양 우리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경이로움 까지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청력 상실 후 그가 만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향곡 9번 ‘합창’은 인간이 가진 희로애락을 넘어 신에 대한 성스러움과 환희를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관객뿐 아니라 같은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곡가들은 눈이 호강하고 귀가 호강하는 음악보다는 마음이 동요되고 가슴이 움직이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은 돈벌이가 괜찮은 그저 가벼운 음악이 대부분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청력상실은 베토벤 인생에 있어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청력상실 덕분에 그에게서 위대한 음악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서인지 필자는 그의 청력상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소중하다. 물론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이를 잘 극복했기에 우리모두 대단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 위기가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고,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혹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이 들면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린다. 하지만 혹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불행도 내가 가진 불행에 비하지 못할 만큼 하찮은 존재가 되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한다.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바람인지 혹인지 중요 하지 않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나에게 보물이 될 수도 혹은 폭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행만을 주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불행과 행복은 동시에 찾아오는 법이다. 위기 속에 분명 해답이 있는 법이고 그 해답을 얻는 순간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믿는다. 베토벤은 난청을 자신에게 최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난청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더욱 성장시켰다.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 음악을 제일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베토벤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래서 우리는 “베토벤, 베토벤” 하나보다.

한정국 선교사2018-04-19

1453년 5월 29일 이날은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며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군대(오스만터키)에 점령당한 날이다. 최근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새 이름)을 다시 방문한 필자는 거리에서 터키 식 커피를 한 통 구입했는데 브랜드가 ‘1453’이었다. 나는 오랜 터키 커피의 역사를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집에 와 뜯어보니 이슬람군대가 기독교 최후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것을 기념해 만든 커피라니 커피 맛이 나에겐 더욱 쓰디 쓴 맛일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전 소아시아 7개 교회 유적지를 두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유적지 돌무더기 위를 걸으면서 나는 깊은 심정으로 오열을 하고 말았다. “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그렇게 멋진 소아시아 교회들, 비록 초기 기독교 형태이지만 그들은 기독 교회사에 새벽별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은 황폐한 땅이 되었으니 “아, 이 빼앗긴 들에도 복음의 봄이 다시 오려나?” 터키를 방문할 때 마다 이 땅이 복음에 심히 저항하는 땅으로, 영적으로 견고한 진임을 느낀다. 작년 앙카라에서 만난 인터서브 선교사는 터키의 개신교도가 5,000명인데, 선교사가 5,000명이란 말을 듣고 나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 이럴 수가?” 올해 다시 찾은 이스탄불에서 20년 가까이 선교한 선교사로부터 터키 기독신도 수가 5,000명 보다 많은 8,000명쯤이란 말을 들었고, 선교사는 5,000명 미만이란 말을 들었건만 도저히 위로가 안 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새로운 봄을 기대하기 오스만 터키 이전 셀주크 터키는 이슬람을 그들의 종교로 집단적으로 받아 들였고, 이것은 제국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오스만 터키 지배 시 소아시아의 수많은 기독인이 그리스 등지로 이동해 복음의 땅이 황무지화 하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이스탄불의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으니, 교회의 단합과 일치 정신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동서로마의 정치적 분열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 왔고, 나아가서 아리우스 논쟁으로 불리는 예수님에 대한 양성론 대 단성론 시비로 소아시아 및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교회를 단성론으로 정죄했으니 이들의 심적 타격은 오스만터키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할 때 일부 신자는 환영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끼리의 정죄와 증오감이 직접 분열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더구나 동로마제국이 셀주크와 오스만 터키 군대의 예루살렘 지배에 대해 서방교회(당시 로마교회)에 구원 요청 시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한 얼룩진 역사가 또 있었다. 이들의 무자비한 무슬림 학살도 교회사에 나온다. 물론 이슬람 군대도 옛 기독교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기독역사가들은 십자군의 과잉 액션을 질타한 바 있다. 이 전쟁의 후유증이 오늘날 이슬람권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들에게는 목에 메고 가는 연자 맷돌이 되고 있다고 허버트 케인은 그의 간추린 교회사에서 역설한 바 있다. 그런데 더 심한 행위는 이 서방 십자군들이 정교회의 성물을 무단 탈취하고 그들의 서방교회 지부(동방교회라 칭함)를 설립하는 등 그들의 그릇된 행동은 동방정교회들에게 너무도 힘든 시련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오스만 군대의 세금 과다 징수(중세과세)와 회유로 인해 많은 정교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화 되는 과정을 겪는다. 콥틱교도들의 눈물 나는 신앙 지키기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는 동방기독교의 한 축이었고, 당시 최대 도서관과 기독교 연구가 한 시대를 밝히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오스만터키 군대가 침략할 때 무력하게 그들을 맞았는데(일부는 환영까지 했으니, 얼마나 서방교회의 단죄에 실망했으면 그렇겠는가?) 세월이 갈수록 이슬람의 회유와 협박은 갈수록 지능화했다. 그러나 자신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이 이런 협박에 넘어가지 않도록 피터지게 신앙을 이어갔고, 이들이 지금은 이집트 전역에서 콥틱 기독교로 그 땅을 지키고 있으니 자그마치 976만 명이나 되고 있다.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손목 뒤에 십자가 문신을 여러 명 보았는데 절대 개종하지 않겠다는 집안 전통의 무서운 의지를 읽고 나는 너무 감동하고 말았다. 이 콥틱 기독교의 영향을 직접 받은 데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인데, 에티오피아를 비롯해 그 이남에 있는 케냐, 탄자니아 등지가 이슬람화 되는 것을 막는데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도들의 눈물 나는 저항정신이 공헌한바 많다. 이 역사의 현장을 확인한 필자는 현지에서 얼만큼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찾는 개신교 선교사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신앙 지키기 정신을 잘 이해하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시키기에 열심이라면 우리는 이런 선교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사실 그들의 단성론도 역사 속에 정죄된 것 보다 양성론에 가까운 주장임을 알 수 있었고, 당시 교단 정치의 희생물이었음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빼앗긴 들에 다시 봄이 오기를 바라는 21세기 현지 선교사들과 그들을 보낸 한국교회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 2000년간 우리 믿음의 형제 안에서 ‘무엇이 다른가?’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쉽게 이단으로 정죄해 우리의 아름다운 땅을 적들에게 너무 쉽게 내주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무엇이 같은가?’ ‘우리 모두가 믿는 분은 예수 아닌가?’ 그분 안에서 4개의 복음서 시각이 있었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너무 같은 것이 많은데 기독교는 너무 많은 실수를 즉 서로 다른 조그만 것에 집착하여 대마를 잃곤 했다. 빼앗긴 들에 다시 한 번 방문하면서 그 땅에서 새벽마다 울며 씨를 뿌리는 5,000명의 선교사를 격려하고 싶다.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게 하고 싶다. 다시 그 땅에 봄이 올 것을 선포하자. 실망 말고 씨를 뿌린 후 물을 주며 저녁때 기쁨의 단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당대의 추수가 어려울 수 있다. 다음 아니고 그 다음세대면 어떻겠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이 다시 오는 소망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오늘 뿌리는 복음의 씨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prev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goodtvICGCCMLOVE굿피플KCMUSA기독뉴스GoodPeople아멘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