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교수 2021-03-03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위치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가 지배종교의 위치를 차지했던 시대를 지나 유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근대 이후에는 국교가 폐지되고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매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샤머니즘과 다양한 신흥종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종교 전시장과 같은 사회이다. 그러나 인구센서스 결과에서는 종교 단체에 속한 공식 종교 인구는 전체 한국인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제도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줄고 있지만 한국인의 정서나 심성에 종교성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지배 종교의 자리를 내어준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유교의 가르침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들도 ‘장유유서’는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정도다. 유교는 다른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가 유교화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본인의 종교를 무속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점집을 찾거나 굿을 하는 등 무속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속은 오랫동안 미신으로 여겨져 왔지만,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최근에 더 증가하는 추세이다. 선거 때나 입시 철마다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손 없는 날’을 찾아 이사 가고, 건물을 짓거나 이전할 때는 으레 고사떡과 돼지머리가 등장한다. 결혼 전 궁합을 보는 것은 필수로 여겨진다. 자신이 소속된 종교와 상관없이 무속에 기대어 삶의 중요한 선택을 결정하고 있다. 등록된 무속인 수가 30만 명에 이르고, 비등록 무속인을 합하면 전체 무속인 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엄밀하게 무당과 신도의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더라도 굿, 점사, 치성을 하는 사람은 줄잡아 10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 종교의 부작용 이렇듯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정서적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거나 출세나 성공의 도구로 여기는 기복신앙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인 사회통합이나 사회변동의 과정에서는 정작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기 때문에 종교 간에 경쟁이 심하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경향은 우월의식이나 배타성이 강한 종교일수록 더 심한데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슬람교의 교세가 매우 약한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두드러진다.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유일신 신앙을 더 강조하고 종교 다원주의를 강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배타적인 성격이 더 짙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게 되면 그 독단성으로 인해 건전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기독교는 오랫동안 지성인들의 비판 대상이 돼 왔다. 2006년 ‘만들어진 신’으로 종교의 허상을 주장한 리처드 도킨스는 ‘신, 만들어진 위험’으로 다시 비이성적 믿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회학자인 필 주커먼은 ‘신 없는 사회’와 ‘종교 없는 삶’을 통해서 무종교 사회가 선할 수 있으며 종교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미국 침례교 목사인 찰스 킴볼은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는 다섯 가지 위험 징후를 다루고, 종교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종교가 사악해질 때’라는 책을 냈다. 그는 교리나 전통의 차이를 떠나 정의와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가 끔찍한 폭력과 반사회적 악행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건전한 종교 생활을 위하여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교 중독’이 이슈가 되고 있다. 종교 중독이란 종교로 인해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고 종교에만 몰두하게 돼 일상생활조차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개신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종교에 빠져서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헌금을 드린다든지, 모든 일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때로는 특정 이념과 종교를 결합해 심각한 확증 편향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모두 과잉 종교화 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결과를 일으킨다. 따라서 건전한 종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고 편견에 사로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종교적 관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면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자신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는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성경 말씀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절대화 할 수 없다.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어떠한 이념이나 세계관이나 가치관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지 말고 다양한 해석이나 견해를 비교하면서 보편타당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성경적’이라는 말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1년 이상 지속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이럴 때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이 돼 주어야 한다. 종교로 인해서 더 힘들어지거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모든 종교인들이 더욱 노력을 해야 할 때다.

이영훈 위임목사 2021-02-27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새로운 적과 치열한 싸움을 했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상황 속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된 사람들은 속절없이 감염돼 큰 고통을 겪거나 심하면 생명을 잃었다.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도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방역 명령으로 인해 일상의 삶이 제한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상실이 꼭 역기능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의 제약은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혹은 사회의 관습을 따라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예를 들면 회사의 재택근무를 들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사회가 되면서 많은 회사가 어쩔 수 없이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했다. 처음 재택근무를 도입할 때는 근무 효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등 여러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온라인으로 업무를 진행하면서 불필요한 중간보고와 잡무, 그리고 상하 인간관계에 소모되는 시간과 정신적인 에너지들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효율이 늘었다는 보고가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선입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업무수행 방식을 찾게 된 것이다. 교회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가 바로 교회다. 코로나19로 인해 진행하던 행사들을 멈추고 나니, 정작 이 행사들이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교회의 귀한 자원이 불필요한 곳들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코로나19가 준 귀한 교훈 중 하나다.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적인 면에서도 코로나19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퍼진 이후 교회의 두 가지 존재 목적인 ‘모여’ 예배하는 것과 ‘흩어져’ 전하는 것이 모두 제한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예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면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가?’, ‘비대면 예배를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다양한 질문이 교계에서 오갔다. 아직 누구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교계의 일치된 답을 제시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예배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같은 비대면 예배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화면을 보며 드리는 예배와 진지한 고민 속에 드리는 예배는 분명 다를 것이다.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본질인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많은 도전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진 것도 한 이유이지만, 그와 더불어 코로나19 상황 가운데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대중에게 드러난 점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제 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거룩함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본격적인 온라인 시대가 열리면서 교회는 더욱 투명하고, 성실하며, 더욱 진실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됐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이 시간을 잘 활용해서 타인과 사회의 시선 속에서 바라보던 나를 깨고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시간을 익숙했던 모든 것을 일단 멈추고 더 나은 답을 찾아보는 쉼표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한국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여주봉 목사 2021-02-24

지난번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전 회복 사건을 통해 교회와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았고, 거기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는 절실한 필요들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회와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조금 더 상세하게 보기 위해 성전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처소) 삼고 거하기 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머물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지도하시고 그들 가운데 운행하기 원하신다. 구약의 성전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세워졌다. 그리고 구약의 성전에 담겨진 하나님의 목적은 신약의 교회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다. 즉,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성전의 완성이다. 바울은 신약의 교회와 성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한다(고린도전서 3:16, 6:19). 구약의 성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 즉 하나님 백성들을 성전 삼고 그들 가운데 거하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이 신약의 교회에서 성취된 것이다(고린도후서 6:16).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 삼고 거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이 구약의 성막에 대하여 말씀하신, 출애굽기 29:42-26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은 신약의 교회와 성도를 향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기 원하신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 원하신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운행하기 원하신다 4)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기 원하신다 5)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도하기 원하신다 또한, 성전에 담겨진 하나님의 비전은 곧 우리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기초하여 우리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기 원하신다. 모세와 아론이 성막에서 제사드리고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할 때에도(레위기 9:23-24),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하나님께 찬양드릴 때에도 여호와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했다(역대하 5:13-14).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예배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거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 빛을 황폐한 성소에 비춰달라고, 즉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성소에 돌아와 달라고 간구했다(다니엘 9:17).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성전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도 그분의 임재로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운행하기 원하신다. 바울도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두루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또한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기 원하신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와 만나기 원하신다. 구약의 성막이 지어진 목적 중 하나도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만나기 위함이었다(출애굽기 29:42-43). 또한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을 찾아 나아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고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회막(만남의 장막)이라는 이름처럼, 우리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5)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를 지도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주신 약속 중 하나는, 성막에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출애굽기 29:42). 실제로 하나님은 성막 위에 떠오르는 구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체적으로 지도하시고 인도해 가시기를 원하신다. 참된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과 열망이 보이는가? 나는 하나님의 그 열망을 보면서, 오늘날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는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배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영광으로 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모든 예배마다 하나님이 강한 임재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이 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셨고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친히 운행하시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친밀함의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우리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시우 2021-02-23

성경적 효 실천에서 가족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관계를 맺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천부와 땅의 아들 아담과의 부자 관계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관계보다 우선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순종하는 성경적 효 실천의 근거가 된다. 우리나라의 ‘건강가정기본법’에서 ‘가족’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다. ‘민법’은 가족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정의한다. 성경은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강조·언급한다. 1. 가족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최초의 공동체다. 가족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보존·이어지는 곳으로서 최우선으로 보호·유지돼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독처(혼자 살아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돕는 배필과 함께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다(창 2:22∼24). 가족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공동체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며, 인간에게는 ‘기쁨’의 공동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단어는 ‘가족’이라고 한다. 2. 성경은 가족 안에서 서로 돌봐주라고 명령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는 가족을 하나님의 마음과 방법으로 돌봐야 한다. 성경적 효는 단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잘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를 돌아보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가족 간 돌아보는 전방위적인 의미다. 3. 가족이 행복하면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도 부강하다.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공동체인 가정에서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진다면 사회와 국가는 안정되고 부강해진다. 가족학의 세계적 권위자 버지니아 사티어는 저서 ‘사람 만들기’에서 가정은 사람 만드는 공장과 같다. 사회를 좀먹는 불량인간들의 생산은 가족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동양 고전 ‘효경’은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미워할 수 없다”고 했다. 성경대로 가족 간 사랑의 효 실천이 화목한 가정,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는 지름길이다.

김양규 2021-02-23

정신병의 90%는 정신분열증이다. 정신분열증은 요즘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그 주된 증상은 환각과 망상의 두 가지다. 환각과 망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과잉분비가 원인이라고 하는 학설이 주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도파민은 흥분성 호르몬인데 이것이 적당량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과잉 분비되면 환각과 망상과 같은 이상증상들이 생길 수 있다. 환각이란 환청, 환시, 환미, 환취, 환촉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의 하나라도 있으면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 중에 환청이 제일 많고 환시는 그 다음으로 많다. 망상에는 사고 장애와 감정 장애가 있다. 즉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는 것과 이상한 감정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망상과 환각을 모두 갖고 있으면 이를 정신분열증이라 한다. 이중에 한 가지만 있을 때는 분열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은 한방에서는 ‘기란’(氣亂)이라고 하는데 기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기는 항상 가볍게 팽팽 도는즉 순기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기가 거꾸로 도는 역기 현상이나, 기가 체하거나 막히는 기체, 기색, 기가 어지럽게 도는 기란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분 열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방에서는 기의 순환을 바르게 해주는 약재를 써서 치료한다. 우리 몸의 가슴윗부분은 항상 물이 있어서 시원해야 하고, 배꼽 아래쪽은 불이 있어서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이것이 반대로 돼 가슴 윗부분이 더우면서 열이 나고, 배꼽 아래쪽이 차가우면서 시리게 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증상이 생기게 된다. 가슴 위로 열이 차올라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정신이 분열되거나 우울에 빠지는 등등의 증상이 생기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므로 육체를 치료하므로 당연 치료될 수 있는 문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귀신들림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완전히 다르다.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요, 정신분열증은 육체의 문제이다. 정신은 육체의 한부분이요, 육체에 속하기 때문에 육체가 약해질 때에 정신이 약해진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물론 영과 정신을 완전히 구분할 순 없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귀신들림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약물에 대해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귀신들린 자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귀신들린 자를 약물로 치료했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나 부인은 귀신들린 자에게 는 꼭 있는 요소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그러지는 않는다.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또한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들린 자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면서 적대시 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결코 그렇지 않다. 괴력에 대한 문제도 확연하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괴력이 없다. 담을 뛰어넘거나 쇠사슬을 끊는 괴력이 없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은 그런 괴력이 있다. 그건 귀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건만 봐도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정신분열증상이 있으면 귀신들린 것으로 오 해하고 ‘기도해야 낫는다’면서 일체의 약물치료 거부와 함께 기도원으로 가게 만든다. 정신적인 질환도 육체 질환의 한 부분이며 분명히 약을 쓰면 치료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사회에서는 이런 병을 왜 이단시할까. 이건 중대한 문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다. 정 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마녀에게 사로잡혔다고 하면서 화형 시켰던 처절한 흑역사가 우리 종교사에 분명히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기나 배탈로 고생할 수 있고 수술을 받을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약해지고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찾아 가족치료나 환경 개선과 집단치료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를 할 생각보다, 사람을 도외시하며 매장시키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식한 처술이다.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구분할 줄 알자.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 무슨 병이든 영적인 유혹과 시험을 받고 사탄의 틈탈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지식 없는 사람들의 예사로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실족케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정기 목사 2021-02-22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항상 좋은 일,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괴롭고 낙심되는 일도 있다. 삶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함께 있다. 그러나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어두운 면을 보면 인생은 고통이고 아픔이지만, 밝은 면을 보면 인생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은 밝은 면을 보고 살기 때문이다. 유다라는 나라는 BC587년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집들은 불타버렸고, 쓸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포로로 잡혀갔고,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은 것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아름답고 거룩한 예루살렘 도성은 짐승들이 서식하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간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자유가 없었고, 물질은 궁핍하고 가난했고, 여기 저기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상황속에서 그들은 꿈을 접는다. ‘이제 우리 민족은 끝났다.’고 모든 백성들은 다 절망한다. 예레미야 마저도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렘애3:18>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망하고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며 자신이 겪고 있는 극한 고통을 기억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께 호소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렘애3:19> '쑥과 담즙'은 아주 쓴 맛을 내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예레미야가 세상적인 소망이 다 끊어져서 힘들어하다가 다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렘애3:31> 갑자기 절망중에 있던 예레미야가 소망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렘애3:22~26절까지 다섯 구절속에 여호와, 주 라는 고백이 다섯 번이나 나온다.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면 절망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니 소망이 새롭게 솟아난 것이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골짜기로 인도하여 신비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사방 천지가 뼈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모두 마른 뼈들이었다. 골짜기 전체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보여주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질문하신다.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그때 에스겔은 '어떻게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불가능을 말하지 않았다.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마른뼈도 살아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모든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게 하신다. 에스겔이 명령에 순종하여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자 이 뼈 저 뼈가 움직이더니 서로 연결되었고, 뼈에 힘줄이 생기더니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었다. 그리고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곧 살아서 일어나는데 큰 군대가 되었다.<겔37:1-10> 놀라운 장면이었다.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을 보여주신 것이었고, 다시 살리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은 절망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선포하라고 보여 주신 것이다.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데 주님은 아직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건강이 나쁘다고, 실패했다고, 좌절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 반드시 회복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주님이 끝났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는 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마른뼈들도 살리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현실이 힘겹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희미해 질수록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소망이다. 상황이 어렵고 절망스러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롬5:3-4절에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소망이 있기에 환란중에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으신다. 때로는 우리가 원치않는 고통을 주시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면 들으시고, 온 마음으로 구하고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하셨다.<렘29:11-13> 모든 문제 뒤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신다. 문제만 보면 절망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끝이다 싶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바라보며 소망을 말하며 살자.

정용구 선교사 2021-02-10

TV 프로그램 중에 <뭉쳐야 찬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거나 자기 종목에서 최고 실력자임을 인정받은 은퇴 선수들로 소위 ‘전설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없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축구를 못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들을 축구선수로 뛰게 하는 것이다. 2019년 6월 첫 방송에서 이들은 일반 조기축구회 팀과의 경기에서 14:1로 대패했다. 이후 두 번째 경기에서 11:0, 세 번째 경기에서도 8:1로 연속 패배했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종목의 전설들인 만큼 승리에 익숙한 그들이기에 연이은 대패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속적임 훈련과 실전 경험을 이어가면서 강팀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봤다. 최근에는 지난 시절 참패를 안겼던 많은 강팀들과 전국대회에서 다시 대결해 준우승까지 차지하는 성적을 거뒀다. <뭉쳐야 찬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선교’와 관계된 생각을 했다. 지금 선교계는 <뭉쳐야 찬다>에서 스포츠 전설들이 ‘종목’을 바꾸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것과 같이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서 모든 것이 얽혀 버렸다. 그렇지만 <뭉쳐야 찬다>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훈련하고 실전을 통해 한 걸음씩 전진했듯이, 선교계에도 <뭉쳐야 찬다>와 같은 도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21년에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선교의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 기존의 방법이 아니라 ‘코로나19’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 적절하게 대처할 선교훈련과 현장경험을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사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가면 <뭉쳐야 찬다>처럼 철저하게 패배를 경험한다. 현지 언어와, 문화도 모르기에 선교사역 초기에는 끊임없이 실패한다. 언어학교에 가서 현지어를 배워도 쉽게 늘지 않아 좌절한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선교현장의 새로운 상황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까지 힘든 시간들을 보낸다. 지금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교현장은 이전의 선교현장과 분명하게 달라졌다. 선교사 한 개인만 보내서 그 모든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모든 선교 에너지와 동력을 모아서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버전의 뭉쳐야 찬다’의 힘을 모아야 한다. 스포츠계 전설들이 자기 분야를 잊고 새로운 종목에 전념하듯이, 우리도 기존의 방법을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새로운 종목의 운동규칙을 하나씩 배워가듯이 코로나 이후의 선교현장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이 팀을 위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안정환 선수가 감독으로 나섰다. 예능이지만 승부의 세계이기에 선수들을 훈련하고 팀을 끌어 올리는데 주력했다. 각기 다른 분야의 스포츠 전설들을 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문성과 끈끈한 관계로 팀의 리더십을 굳건하게 했다. 경기 후반부에 경기력이 향상된 팀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놀란다. 축구에 문외한이던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러면서 ‘감독’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지난해 많은 선교의 전설들과 같은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종목 변경을 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코로나로 인해 바뀐 새로운 선교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좌절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시 일어나 힘을 모아 선교 버전의 ‘뭉쳐야 찬다’가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시우 2021-02-08

과거 동양의 전통적 효에서는 어린이와 여성이 무시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셨다(마 19:14). 성경의 효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순종의 효와, 부모와 노인 공경의 효를 포함하고, 성경에는 분명히 ‘효’글자도 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孝)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딤전 5:4). 이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목회서신이다. 따라서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목회자들도 먼저 성경적 효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자녀들도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배울 의무가 있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온 동네가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가정과 학교, 사회와 교회, 정책당국에서 부모 어른 스승 등 기성세대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역할은 다음과 같다(최성규 ‘효실천 210’ 참조). △어린이·청소년·제자가 우리의 희망임을 안다. △어린이·청소년·제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한다. △가정 안에서 자녀를 출산한다(창 1:28). △국가 정책적으로 효를 장려하고, 건강한 청소년을 육성한다. △학교와 교회에서 사명감 아래 바른 인격과 꿈꾸는 제자를 배출한다. △어른들은 어린이·청소년·제자에게 삶의 본이 된다. △어린이·청소년·제자에게 3심 곧 신앙심, 애국심, 효심을 심어 준다. △어린이·청소년·제자에게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 △잘한 일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칭찬, 잘못한 일에대해서는 사랑의 권면을 한다. △어린이·청소년·제자가 본받고 싶어할만한 어른인지를 성찰한다. 각 학교에서는 교사 혹은 선생, 학생이라는 호칭보다 ‘스승과 제자’로 하는 것이 상호존중과 인격교육의 효과 면에서 더 유익하다. 그런데 최근 언론 방송 등에서 선생님을 줄여 ‘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인격교육면에서 맞지 않다. 과거처럼 어린이가 무시·학대를 받아도 안 되나, 너무 과잉보호 돼도 안 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의 희망이요 미래인 어린이·청소년·제자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또한 성경적 효복을 누리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잘 돌봐야 한다.

신동식 목사 2021-02-07

요즘 한국교회가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매 맞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이미 코로나 시작부터 조짐을 보였지만 이제 거의 일상 수준이 됐습니다. 교회의 미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연신 때리는 소리만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 맞고 있는 대상이 말이 없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맞고 있습니다. 맞으면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좀 더 세게 때려 달라고 요청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선한 일에 열심일 때 누구도 열을 내어 칭찬하고 소문을 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교회가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달려들어서 물어뜯습니다. 기회만 보고 있는 하이에나와 같은 이들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먹잇감을 찾고 있다가 발견하면 온 힘을 다해 갈기갈기 찢습니다. 한번 물리면 최소한 중상입니다. 이것이 본래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재간이 없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준 교회를 향한 예의도 없습니다. 교회는 동네북입니다. 지금은 심할 정도로 얻어맞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왜곡된 이단과 단체들의 무지가 한몫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단체들의 탈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니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문제를 일으키는 단체 가운데는 정상적인 교회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교회가 매 맞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편견에 심각한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이 따라옵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본성적인 죄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핍박이 따라왔습니다. 이런 핍박은 정상적이고 영광이 됩니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것이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교회의 매 맞음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일까요? 죄로 인한 매일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절묘하게 섞여 있습니다. 우선 한국교회가 선을 행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일보다 정치를 통한 권력 잡기에 열심을 냈습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지 않은 대가는 반드시 부메랑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가 범한 죄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러한 기회를 절묘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철저하게 부서지게 만듭니다. 교회의 상처는 상당 간 회복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교회는 긴 시간 차디찬 혹한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지역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많은 시간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는 현상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입니다. 뿌리가 뽑혀진 교회는 생명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당분간 견디겠지만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에 교회는 점점 늙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 맞음이 전부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에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우선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교회가 바르게 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차 없이 부끄러움을 만든다는 사실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경고 나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교회였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빠른 성장만 중요했지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일에는 무관심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둘째는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개인 신앙에 머물러서 진리를 구별하는 일에는 미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한 경각심을 바르게 가지게 됐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가르친 교회는 혼돈의 시대에 그 진가를 나타내겠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경각심은 순결한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전제되는 일입니다. 셋째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좀 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지역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섬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여기에는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역이 없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넷째 교회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합니다. 지역의 한 교회가 무너지면 바로 우리 교회가 무너지는 소리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위치를 다시 새겨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이 인식이 매 맞음을 통해 다시 각성해야 할 사실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이 아니라 소명에 맞게 삽니다. 우선순위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극한 경쟁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보일 수 있습니다. 여섯째 지혜도 없고 순결하지도 않아 사단에게 틈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오직 교회 성장이라는 성공주의에 빠져서 순결하게 행동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서도 지혜롭지 못했던 모습을 냉철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등대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가 직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상처와 혼란을 주는 위치가 됐다면 그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 됩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앞으로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지만, 이 일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매가 아니라 심판이 다가옵니다. 매 맞고 있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을 받을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 버려두실 날이 옵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사랑에 응답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김명전 GOODTV·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2021-02-03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1월 20일(현지 시간) 취임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매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상호견제와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고 냉전시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연대하려는 시도도 감지된다.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핵무기에만 매달리는 모습이다. 한일 관계는 아베부터 스가 정부에이르기까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다. 바이든 시대의 한반도는 어디로 갈까?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지위와 역할을 포기한 것이 도화선이다. 미국 일방주의와 시진핑의 ‘위대한 중화민족 부흥’이 세계 패권경쟁에 불을 붙였다. 두 나라의 각축으로 기존 국제질서의 틀이 흔들리고 있다. 카오스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 시점에 바이든 정부가 출범했다. 새 정부가 보일 리더십이 궁금하다. 바이든이 주목받는 이유다. 바이든의 급선무는 코로나19 극복과 내부결속이다. 다음은 국제질서를 재정립하는 문제로 갈 것이다. 신냉전 체제경쟁이다. 어디까지 확장될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다. 미국이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응해 1차로 내놓은 국제 연대 카드가 쿼드(QUARD4)다. 인도와 태평양 일대의 안보를 명분으로 한 군사동맹이다. 호주 일본 인도와 연대해 중국에 대응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도 참여를 요청한 바 있다. 바이든 시대 미국은 더 강력한 연대 카드를 내밀 것이다. 미중일러 사이서 독자적 공간 확보 미국의 동맹연대 전략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관건이다. 국제적 연대와 협력에서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시장경제’라는 경제 질서다. 국제관계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어느 나라도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는어렵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난감한 것은 미중의 패권경쟁에서 줄서기다. 민족공동체의 생존이 걸린 동맹관계를 잘 지키면서 이웃과도 척지지 않는 묘수의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만의 독자적 외교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분단 상황과 중국과 접경 국가인 특수 상황에서 그 공간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일정부분 암묵적으로 양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외교역량을 총동원해 독자적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주변국과 원만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 바이든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국제관계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이다. 한국정부는 남북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고 싶어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상당한 진전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장 변화를 일으킬 만한 남북간, 북미간의 모멘텀도 없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장애물이 되고 있다. 남북 간의 교역과 교류를 일시에 묶어버리는 잠금장치로 쓰이고 있다. 특히 의료 역량이 취약한 북한은 방역을 앞세워 국경차단과 교류중단으로 대응하고 있다. 북한 내부의 정국 상황도 반영된 조치로 읽힌다. 김정은이 집권 10년 차에 총비서로 승격했다. 권력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는 신호다. 북한의 오래된 목표는 핵 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핵 동결을 조건으로 경제적 보상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제 북을 협상테이블로 불러올 카드는 경제문제밖에 없어 보인다. 북한경제는 핵 도발에 대한 국제적 제재와 코로나19, 자연재해로 최악이다. 김정은 스스로 경제실패를 자인했다. 그럼에도 문을 잠근 채 자력갱생을 외치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버틸 수 있을까? 한국의 딜레마다. 관건은 바이든 시대 미국의 북핵 대응이다. 올 상반기 안에 북미협상이 열리기는 어려운 여건이다. 열린다 해도 북한이 기대하는 핵 협상은 불가능하다. 현시점에서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선제적으로 미국과 협상의 공간을 만들 틈새가 없다는 점이다. 북한의 호응이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 체제가 안정화되면서 북한은 급할 게 없다. 서두르지 않고 핵무력을 고도화하는데 시간을 쓸 계산이다. 그리고 올 하반기와 내년 한국의 정권교체기를 협상 타이밍으로 잡을 것이다.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들이기 위한 적정 수준의 핵 도발을 통해서다. 남북관계 별 진전 없이 마감될 가능성 반면 문재인정부는 시간이 없다. 올 상반기 안에 북한을 협상테이블에 앉도록 해야 한다.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에 협상력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21년 한국의 국내 사정이 만만치 않다. 4월은 서울시장 등 굵직한 재·보궐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곧이어 차기 대통령 선거를 향한 경쟁이 펼쳐진다. 코로나19와 선거를 제외한 여타 국정과제가 추동력을 갖기 어려운 정치 환경이다. 바이든 시대의 한반도, 북한 핵 문제와 남북관계 개선은 2021년도 별 진전 없이 마감될 공산이 크다. 쾌도난마(快刀亂麻)로 해결할 수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결코 아니다. 북한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한미동맹이 건재하는 한 한국을 배제한 북미협상은 없다는 점이다. 남과 북이 지혜를 모으고 협력해야 하는 이유다. 북한이 우리의 선의를 잘 이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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