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원장2017-04-25

문화재청은 지난 20일 존 번연의 천로역정(합질) 게일 선교사 번역 초판본 2종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라는 남자가 ‘장차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존 번연(John Bunyan) 저자 존 번연 (John Bunyan)은 1628년 11월 영국 베드포드의 엘스토에서 태어났다. 번연의 아버지는 떠돌이 땜장이로 가난하게 살았고 자식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번연은 겨우 쓰고 읽는 정도를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여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특히 성경을 탐독하였고 존 폭스의 <순교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번연은 감수성이 강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644년 번연이 16세일 때 6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7월에 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는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려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번연은 난폭하고 사나운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었다. 1644년부터 1647년까지는 찰스1세 왕당군에 대항하는 크롬웰의 의회군에 징집되어 3년간의 군대생활을 하였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노름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군 생활에서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군이 가진 경건한 신앙생활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제대 후 1649년 마리아라고 하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책 2권을 결혼선물로 가지고 왔다.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길>과 <경건의 훈련>이다. 이 책을 통해서 번연은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서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으며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거친 번연을 인내와 섬김으로 받들었고 약점을 공격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충고해서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1650~55년까지는 번연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번연의 일생에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포드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1653년 번연은 성요한 교회의 정규회원이 되어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그 해 아내인 마리아가 사망하였다. 1659년 번연은 둘째 아내로 엘리자벳을 맞이하였다. 기포드 목사가 죽은 후 번연은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2세의 왕정복고로 청교도 전성시대가 끝나고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국교로 복귀시켰으며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번연은 비국교도로 성직을 받지 못하였으나 설교를 계속하였으므로 설교금지령을 위반하여 12년 (1660~72)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672년 찰스2세가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관용을 선포하여 번연은 5월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포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675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6개월간 투옥을 당했는데 이때 <천로역정> 제1부를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1678년 천로역정(제1부)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때문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제임스2세가 번연을 국교도로 모시기 위해 여러 가지 유혹을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1684년 천로역정 제2부를 출간하여 천로역정을 완성하였다. 1688년 번연은 런던에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책 출간과 게일 선교사 천로역정 제1부는 1677년 12월 22일 인쇄가 끝나고 1678년 2월 18일 출판면허를 얻는다. 1677~78년 런던의 폴트리에 있는 피콕 서점의 사장 나타니엘 폰더에 의해 발행되었다. 초판에 이어 같은 해 재판이 간행되었고 생전 11판을 내는 동안 상당한 내용증보가 이루어졌다. 천로역정이 서양에서 최초로 번역된 것은 1682년, 네덜란드이다. 그 이후 1685년에는 프랑스, 1703년에는 독일에서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도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는 1853년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영국선교사 번스(W.C.Burns)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역본이 나왔고 이때 서명을 천로역정(天路歷程)으로 지었다.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내에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로력뎡>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성결교의 이성봉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 텬로력뎡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보급과 한글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자다. 최초로 번역된 텬로력뎡 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5년 초판에 이어 1910년에 나온 재판은 연활자로 인쇄되었는데 기일 목사 역 이창직 교열로 바뀌었으며 장로교서회가 발행했다. 3판은 한국종교서적소책자학회의 발행으로 1919년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재판과 3판의 삽화는 초판을 축소하여 동판으로 인쇄했으리라고 추정된다. 1920년에 나온 텬료력정 3판 끝에는 ‘본셔의 뎨이편 텬셩려행기가 츌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긔독도의 쳐자가 그 남편을 따라 멸망의 셩에서 행한 것이라. 특별히 녀자와 아해의게 자미가 잇슬것이니 한번보시기를 바라옵’이라는 광고가 나와 있다. 텬료력졍 뎨이권은 ‘긔독도 부인 려행록’이라고 부제를 붙여서 1920년 8월 10일 신문관 인쇄 조선 야소교서회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부인이 번역한 이 책에는 제1부와 화풍이 다른 삽화 10장이 게재되어 있다. 게일과 언더우드 목사 부인의 번역본에 이어 1936년 조선기독교서회에서 오천영의 번역으로 제 1부가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삽화 10장이 수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1949년부터 조선기독교서회의 오천영 번역의 재판에 이어 많은 번역본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천로역정> 재조명 시급 게일 부부에 의해서 번역된 텬료력뎡 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이며,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한 책이다. 기독교신앙이 한국에 상륙한 19세기 한국은 열강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민중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되었다. 천로역정이 소개되고 130여 년이 넘은 오늘 한국교회는 천성을 향해 건강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기복주의와 개인주의 신앙이 열병처럼 번지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유혹 앞에 오염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 세계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또한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존 번연의 사상과 천로역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더불어 최초로 번역, 소개한 게일 선교사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김명전 대표이사2017-04-24

도시바, 142년의 역사를 간직한 일본 전자산업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그 도시바가 몰락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약5조 5600억 원의 영업적자를 냈고, 2조 3500억 원의 자본을 잠식한 것으로 드러났다. 도시바의 감사법인 PwC는 지난해의 회계감사를 마치고 감사 의견을 내지 않았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도시바는 일본 최초로 냉장고와 세탁기, 컬러TV를 생산했다. 세계 최초로 노트북과 낸드플레시 반도체를 개발, 반도체산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기업이었다. 도시바가 몰락의 길로 빠진 표면상의 이유는 2008년 미국의 원자력발전회사 웨스팅하우스 인수가 실패로 끝나면서부터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다. 몰락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이른바 ‘도시바 병’이다. 일본 언론은 이 병을 치유하지 못한 데 있다고 진단한다. 도시바 병, 병원균(病原菌) 핵심은 오만이다. 고도 산업화 전성기인 1970-1980년대 도시바는 초일류 기업이었다. 일본의 최고 명문 도쿄대 졸업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 매출 500조 원을 넘기는 글로벌 거대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일류 거대기업 도시바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는 자만에 빠졌다. 자만은 조직문화와 의사결정 시스템을 폐쇄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는 곧바로 글로벌 산업 환경의 변화와 트랜드를 무시하는 무모함으로 나타났다. 조직의 의사결정이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체 검증하고 교정할 능력이 없다. 리스크 관리의 부재로까지 이어진다. 오만에 빠진 폐쇄적 조직은 필연적으로 관료화되고 파벌주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관료화는 바로 상명하복의 의사결정이다. 파벌주의는 기업 전체보다는 소집단의 이익에 충성한다. 도시바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바로 원자력사업 진출이다. 2008년에 진입한 원자력발전 산업이 불과 3년 뒤인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위기를 맞았다. 원자력에 대한 산업 환경이 급변했지만 제동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고장 난 브레이크를 단 자동차 처지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이 도시바가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는 보도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도시바 사태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얻어야 한다. 도시바는 일본에만 있지 않다. 한국에도 있다. 대우조선해양이 그렇게 가고 있다. 먼저 공기업에서 민영화한 기업이나 준공기업을 주목해야 한다. P사, K사 등 아직은 건강하지만 언제든 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약점은 오너십 부재로 인한 자정능력 취약과 외부세력의 개입이다. 한국 기업이 ‘도시바 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후보 기업의 공통점은 정치권과 퇴직임원들이 파벌을 이용해 파이프라인을 꽂거나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부패의 먹이사슬로 얽혀 있다. 파벌주의는 기업의 경쟁력을 말살하는 주범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과 창출보다는 파벌에 기대어 묻어가는 프리라이더(Free rider)의 온실이다. 기업의 관료주의는 기업가정신의 무덤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개척해 새로운 비즈니스의 세계를 창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 관료주의는 지시에 따르고 리더의 요구에 맞추는 순응의 질서다. 한국 기업인의 기업가 정신은 정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다. ‘도시바 병’, 5월 새로 출범할 정부가 산업과 기업 구조조정에서 유념할 대목이다.

문형욱 대표2017-04-21

데이트를 하고 있는 크리스천 청년들 중 특히 자매들은 '언제쯤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할까?' 궁금해 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한다. 형제들보다 자매들이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하는 이유는, 형제들은 주로 결과중심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본인이 교제를 하면 결혼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자매들은 과정중심적이다 보니 심사숙고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형제, 자매들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자매들의 경우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데이트를 할 때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은 집안 어른들뿐 아니라 주변 지인들의 관심으로 인해 결혼에 대해 발표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언제 해야 하는지,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드는지를 고민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언제 어떠한 마음이 들 때 결혼을 해야 할까요? 지금 교제하고 있는 이 친구랑 정말 결혼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결혼을 한 사람들이 정말 대단해 보이고, 결혼을 선택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해한다. 그리고 어떤 음성을 들었는지, 어떤 확신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마음은 어느 정도 결혼 적령기가 됐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매들에게는 많은 고민으로 다가온다. 우선 우리가 여기서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마음이 들 때 결혼을 해야 하는지'보다는 '지금 내가 이 사람과 왜 교제를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봄으로써, 기본에 충실한 마음을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그냥 뭐 이제 나이가 됐잖아요”라며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내가 결혼을 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것이다. '뭐 다 아는 이야기네요'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어 지금보다 더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더 크게 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고 싶고, 설레고, 헤어지기 싫기 때문에, 남들도 하니까, 헤어지면 다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라는 마음으로 결혼해야겠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점검하고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교제하고 있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우리의 미래가 때로는 두렵고 불안하지만 함께 하나님 안에서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충분히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교제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친밀감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안전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이며, 상대방의 내면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다. 친밀한 마음을 느낄 때, 함께하면 편안하고 여유가 있을 때, 결혼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강경민 목사2017-04-20

한반도의 평화가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다. 위기를 강조하다 보면 일상의 평화가 깨지기 쉽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의 평화를 강조하다 보면 위기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전쟁이 휴전상태에 들어간 지 벌써 64년이 다가온다. 휴전상태가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경우가 세계역사에 또 있었는지 필자는 모른다. 왜, 이런 역사적 파행이 한반도에서 지속되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주변 강대국 탓을 많이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의 탓만 해온 우리의 자화상이 심히 부끄럽다. 우리 국가의 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중의 문제요, 러시아와 일본도 한반도 상황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 곧 남북문제의 주체는 우리라는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겠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반도를 비핵지대화 해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 역시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계속해 온 것도 그 역사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 갑자기 한반도의 평화가 위태롭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트럼프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까지 미국이 선택한 자칭 전략적 인내를 하루아침에 팽개쳐버리고 북한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선제공격(침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니, 트럼프란 사람의 행태로 보아 그런 짓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 바로 한반도 위기의 근원이다. 북한이 계속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위기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속임수다. 물어보자. 한국전쟁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민주시민의 끊임없는 요구를 미국과 한국 정부는 어떻게 평가해 왔는가? 세계의 양극체제가 무너진 후 대한민국이 중국?러시아와 수교했듯이 미국?일본이 북한과 수교해야 한다는 민주시민의 끊임없는 평화적 요구에 미?일 당국이나 한국의 소위 보수정권은 어떤 반응을 보여 왔는가? 한국보다 대략 50배나 국가경쟁력이 뒤지고 있는 북한이 닫힌 분을 열고 세계평화의 길로 나서도록 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무슨 배려를 했는가? 생각해보라. 북한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진보세력이 대한민국에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1% 미만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 9년 동안 MB와 박근혜 정부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시민들을 걸핏하면 종북세력으로 몰아붙였지 않은가? 도대체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보수정권이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북한이 두 손 들고 항복하기를 기다렸을 뿐 평화를 위해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횡포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트럼프라는 느닷없는 사람이 나와서 북한을 옥죄고 남한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중국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겠다.”고 한다. 북한이 중국의 동북4성인가? 중국인들 북한을 어떻게 하겠는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 사람이 죽는가, 한국 사람이 죽는가. 전쟁 시작 전에 한국에 체류 중인 미국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빼내 갈 것 아닌가. 그러면서 왜, 북한이 말을 안 들으면 선제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한반도에 7,000만 겨레가 살고 있는 것이 트럼프에겐 작은 일인가. 무슨 자격으로 한반도에서 전쟁 운운 하는가?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이 트럼프의 입장을 지지하는가. 트럼프여 알라. 미국이여 각성하라. 한반도 문제의 주체는 대한민국이요, 북한이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고마운 조력자(Helper)임을 명심하라!

안용준 목사2017-04-19

루터,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운 신학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을까? 이름이 주는 뉘앙스처럼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지적하고 단순히 도덕적인 갱신을 시도하는 것인가? 중세 말기의 교황과 교회의 도덕적 타락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고려할 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흐리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을 가지도록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가로막는 이미지들이 삶 가운데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당시 북유럽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일들이 이제 교회와 사회 전반의 이슈가 될 만큼 커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직접적인 계기는 면죄부의 판매와 이미지의 미신적인 숭배였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이러한 일은 있었다. 원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성화상(Icon)은 이제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됐다. 성모 마리아가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하면서 성모상은 최상의 관심을 모으는 교회의 전시물이 됐다. 당시 지체 있는 관리들 사이에서는 성유물을 수집하는 관습이 성행했다.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에 보호해 주어서 종교개혁을 완성시키는 데 일조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조차 5005점의 성유물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시기에도, 이미지의 숭배는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사실은 이미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사의 노동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에 이미 여기저기에 순교자의 성유물이라 선전하며 관심을 모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열하고 몰염치한 시장을 열고 한판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현실에 깊이 탄식했다. 그 무렵부터 여러 곳에서 채집한 골을 성자의 유골이라고 부르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믿게 하는 기만이 거듭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그에서 성모마리아 상에 경배하는 순례자들 그런데 왜 루터에게서 이 문제가 크게 제기됐는가? 이것은 교회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성경과 신앙에 근거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시대로 무르익어 갔다는 말이다. 사회의 실제적인 문제였고 모든 계층의 관심사가 될 정도였다. 면죄를 받기 위해서 치르는 대가 중의 하나가 성유물이란 이름의 이미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성물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로써 비텐베르크 성과 대학 교회에는 많은 성유물이 기증되고 매년 공공에 전시됐다. 이때 특별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당시 루터는 수도사로서 세상에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1507년 사제의 서품을 받고 1513년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시편 강해를 시작으로 성경 강의를 시작한 젊은 학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1515년 시편 51편과 로마서 1장 17절의 강해를 통해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그의 동료 수도사나 제자들에게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일은 루터에게 고행과 선행을 통해 죄사함과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이 주는 불확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지의 올바른 사용과 ‘성경적 예술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 초석이 됐다. (다음편에 계속)

김은호 목사2017-04-14

진 밖에 세워진 회막 출애굽기 33장 7~11절에 보면, 시내산에 올라 목숨을 걸고 다시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모세가 진 밖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회막이라 부릅니다. 회막은 어떤 곳입니까? 회막은 만남의 장소라는 뜻으로 광야에서 정식으로 성막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던 장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회막이 어디에 세워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이 세워졌습니다. 원래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중앙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임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려면 철저하게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며 죄와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막으로 나아가는 자들 이렇게 모세가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회막을 쳤을 때에 그 회막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갔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회막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지도자인 모세와 여호와를 앙모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도 공동체의 죄를 깊이 깨닫고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자들 이렇게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회막을 향해 나아갔지만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장막에 머무르며 바라만 봤습니다. 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가지 않고 장막 안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것은 장막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관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았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드리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장막 문에 서서 예배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여호와를 앙모하여 회막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고 멀리 서서 바라만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는 자들이 많을까요? 아니면 바라만 보는 자들이 많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아가는 자들보다 멀리서 바라만보는 구경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기회주의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대세를 따르고 사회적 분위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따르고 창조의 질서를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회막에 임한 구름기둥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구름기둥이 회막 문에 내려섰습니다. 시내산 정상을 덮고 있던 구름이 모세가 설치한 회막 위로 이동해 구름기둥으로 회막 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름기둥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구름기둥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임재해 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에 구름기둥이 서 있었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회막은 볼품도 없고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볼품도 없고 초라하게 보이는 그 회막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웅장하고 화려한 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볼품이 없고 초라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곳이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하심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회막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만나면 서로 마주보고 앉아 마음을 툭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와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모세와 친구처럼 서로 대면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종교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이 연약한 피조물을 향해 “너는 나의 친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는 나의 친구” 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친구로서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마음을 툭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는 그러면 왜 예배도 드리고 사역도 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있고 순장과 목자로도 섬기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없을까요? 아니 사역은 있는데 왜 친밀함이 없을까요? 모든 관계에서 친밀함은 함께하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관계만으로 친밀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회막으로 항상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속에 있었습니다. 시내산 아래 광야에 있을 때에도 항상 하나님이 임재하신 회막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갔듯이 모세 역시 거룩한 습관을 따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항상 그 회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온전한 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김명혁 목사2017-04-14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구원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이시라는 고백을 저는 하고 또 하고 또 합니다. 전에는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굽도 앗수르도 니느웨도 로마도 공산권도 이슬람권도 모두 때려 부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그런 주장을 했지요. 그런데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원수의 나라들과 화해와 평화를 이룰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사 19:23,24). 악독이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한 니느웨를 바라시면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친히 실천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며 '화해와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지금 한국교회만큼 소위 원수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는 대신 '분노와 증오와 정죄'를 지니고 있는 교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소위 원수들을 향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손길을 펴는 대신 '적대와 대결과 공격'의 발길을 내차는 교회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남북의 적대와 대결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와 정치계가 최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은 우리들에게 해를 입힌 소위 원수들을 향해서 '적대와 대결과 공격'의 자세를 지니고 있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일이고, 야곱과 요셉이 자기에게 잘못한 형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한 것처럼 울면서 '화해'하는 일이고, 불쌍한 우리 북녘 동포들에게 '인도적 지원'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1997년 3월 31일 강원도 평창에서 1,690톤의 감자를 사서 99대의 대형 트럭에 실어 인천에서 선적하여 북한으로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고산지의 감자가 풍작이었던 까닭에 썩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5개 종단 지도자들에게 호소한 결과 기독교에서 1,000톤 천주교에서 340톤 불교에서 140톤 원불교에서 60톤 한국적십자사에서 150톤 총 1,690톤의 감자를 사서 북한에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또한 2010년 8월 27일 5개 종단의 대표들 9명과 함께 25톤의 대형 트럭 13대가 실은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개성으로 가서 북한 '민화협' 실무자들에게 전해주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밀가루를 가지고 북으로 가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통일부의 서호 국장과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과 충고의 말을 쏟아놓은 결과 4시간 후에 방북 허락을 받아 개성으로 갔습니다. 개성 여기 저기서 만난 북측 군인들과 간부들이 우리들이 어려운 일을 했다고 고마움을 표하면서 언제 또 오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남북의 '화해'와 '인도적 지원'의 손길을 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오는 6월 9일 한복협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남북의 화해와 대북 인도적 지원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기로 했고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양승호 장로(월드비전 회장), 도재영 이사장(동북아 평화연대 대표), 허문영 박사(평화한국 대표)가 발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곤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순교자들이 흘린 피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대북 인도적 지원'의 길이 하루 속히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신동식 목사2017-04-13

우리 시대는 건강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은 차고 넘치는 지경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건강 박사 같습니다. 그만큼 건강에 대한 관심과 집중이 높아졌다는 의미입니다. 100세 시대를 말하고 있으니 건강하게 노후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80세 되신 분들을 쉽게 봅니다. 그런데 정정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건강을 위하여 정말 힘쓰고 있습니다. 국가 제도도 잘 되어 있습니다. 건강보험은 우리의 수명을 늘리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말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건강이 단지 육신에 머물고 있는 우리 시대는 정신적인 빈약함에 대해서는 고민이 적은 것 같습니다. 건강이 좋은 것 가운데 하나를 찍어 보라면 저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균형을 잘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철 낙상 사고는 대부분 노년층에 일어납니다. 화장실 미끄럼 사고도 동일합니다. 몸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신세계에서도 동일합니다. 건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분별력을 가지고 균형 있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계관이 허약하거나 분열되어 있으면 자주 넘어집니다. 최근에 가짜뉴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외형은 진짜 같은데 내용이 가짜입니다. 기사는 형식이 비슷한 것 같은데 쓴 기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작성한 곳의 주소도 없습니다. 모든 거짓된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짜 뉴스가 많았으면 '팩트 체크' 즉 사실 확인이라는 뉴스가 나올 정도입니다. 우리 시대는 정보를 공유하는 속도가 마치 빛의 속도와 같습니다. 가짜 뉴스가 양성되면 동시에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짓 뉴스에 잘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가짜 뉴스는 매우 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긁어주고자 의도적으로 만든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빈약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덥석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먹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처참한 지경입니다. 거짓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거짓의 아비가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에 놀아나는 것은 바로 사단의 졸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은 파괴가 목적입니다. 참은 선을 이루는 것에 힘을 쏟지만 거짓은 파멸에 정성을 다합니다. 그래서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철저하게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 일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입니다. 사단을 광명한 천사와 같이 비유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나타나서 모든 것을 훼파하는 짓을 합니다. 참으로 사악한 일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소유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사단의 미혹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는 혼란스런 시대에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놓고, 절망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합니다. 참되고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혼돈하게 하거나 무시하게 만듭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함정에 빠져 신음하게 됩니다. 이제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의 계절이 왔습니다. 그리고 각종 말들이 온갖 매체를 통해 넘쳐 날 것입니다. SNS는 첨단의 도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우리의 세계관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저리 넘어지지 않습니다. 큰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보고 듣는 자만이 건강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를 물리 칠 수 있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김명전 대표이사2017-04-12

중국에서 생산된 초미세먼지로 인해 한국과 일본에서 매년 3만여 명이 자연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한 연구결과다. 2007년 한 해에만 6만여 명을 사망케 했다. 중국인 조기(早期)사망자를 제외한 통계다. 6만여 명의 조기 사망자 중에 절반이 넘는 숫자가 한국인과 일본인이다. 연구결과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은 이 연구를 중국과 함께 진행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칭화대와 베이징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국제공동연구진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결과다. 한국과 일본의 피해가 큰 것은 바람의 방향인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지목한 것은 중국의 환경규제가 국제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해 미세먼지 생산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미세먼지로 인한 인접국가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입장이다. 과학적인 연구결과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번 <네이처>지의 발표는 중국의 연구진과 함께 밝혀낸 과학적인 결과여서 더 이상의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됐다. 더구나 피해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 등 인접국은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없다. 한반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받아왔다. 중국의 산업화 이전에는 황사, 이후는 스모그까지 겹쳐 오고 있다. 중국이 동부 해안에 각종 중화학 공장을 집중 배치하고 한국에 매연과 초미세먼지 직격탄을 쏘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서울 등 수도권의 대기 중에 있는 2.5 마이크로미터 미만의 초미세먼지 80% 이상이 중국에서 건너 온 것이라는 분석에서 확인된다. 중국은 한국이 구축하고 있는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무산시킬 목적으로 경제보복까지 감행하고 있다. 국제규정 위반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정치적 이유로 무역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중국은 우리 수출의 25%를 차지한다.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의 47%가 중국인이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정치적 압박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중 양국이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중국이 한국에 보내는 미세먼지로 매년 3만 명 이상이 심장병, 폐암 같은 치명적 질병으로 일찍 죽고 있다. 미세먼지의 80%는 중국이 보내 온 것이다. 중국의 사드 경제보복은 한국을 업치고 덮치는 꼴이다. 사드와 스모그경제를 비교해 보자. 중국의 스모그경제로 한국의 피해는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초미세먼지로 인한 조기사망자가 2060년에는 3배로 늘어난다고 경고한다. 한국은 OECD 34개 회원국 중에서 온실가스 배출 순위 5위다. 미세먼지 감축을 국가적 과제로 선정하고 52조 원에 달하는 예산을 편성했다. 석탄 등 화석연료의 비중을 낮추려는 노력도 중국의 협력 없이는 무위다. 중국이 경제개발 이익을 얻기 위해 한국이 스모그 미세먼지 피해라는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유엔결의(제2625호)를 위반해 한국에 보복적인 경제 조치를 감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경제적 피해는 17조 2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사드는 중국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 실현되지 않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보복할 입장이 아니다. 중국이 사드와 스모그를 넘어 한국에 더 이상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이유는 수만 가지도 넘는다.

이영훈 목사2017-04-10

지난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사에 깊은 상처로 남을 대통령 파면이 선고됐다. 탄핵 인용의 찬반 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을 전후로 국민들이 둘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와 같은 아픔은 단 한 번으로 족할 것이다. 아픈 과거에 계속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곳곳에 배어있는 부정부패를, 잘못된 관행, 권력 남용을 청산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는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확정된 조기 대선을 통해 참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참된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일까? 참된 지도자의 요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해보고자 한다. 첫째,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국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섬기는 지도자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는 자연스럽게 낮은 자리에서 국민을 섬기게 되어있다. 겸손과 섬김은 지도자의 막강한 권력이 과연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를 깨달을 때 가능하다. 지도자는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겸손과 섬김은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자신이 먼저 낮아지기보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풍토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정부는 대기업에게, 대기업은 중소기업에게, 중소기업은 하청 업자들에게 대접받고자 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먼저 이러한 고리를 끊을 때에 우리나라에 섬김의 문화가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참된 지도자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지도자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직이다. 지도자가 정직하지 못하면 그 지도자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는 당연히 떨어지게 되어있다. 대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이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해가 갈수록 신뢰도가 하락하는 것을 우리는 매번 경험했다. 참된 지도자는 거짓된 약속과 선동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모습을 투명하게 보이고, 실제로 자신이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번 대선을 통해 정직한 지도자가 선출될 때에 정의로운 정부, 더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참된 지도자는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통일을 준비하는 지도자다. 아직 우리나라는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분단의 아픔도 모자라 지금은 우리 사회 내부도 분열되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선출될 지도자는 분열된 여론을 화합시키고,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달려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 어느 측의 지도자가 선출되든지 간에 공산주의자와 극단의 종북좌파를 제외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모든 진영을 하나로 아우를 때 앞으로 있을 평화 통일을 위한 준비들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요건을 고루 갖춘 참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과연 꿈만 같은 일일까? 약 2,000년 전에 이 같은 지도자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참된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누구보다 정의로우시고, 화합을 이루시기 위해 힘쓰시고, 겸손하신 분이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로 양의 무리를 인도하는 거짓 교사들을 꾸짖으셨고,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 됨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예수님을 닮은 지도자, 작은 예수와 같은 지도자가 바로 이 시대의 참된 지도자일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국민을 겸손하게 섬기고, 분열된 나라를 하나 되게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나라 가운데 나타내는 참된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정기 목사2017-04-05

우리는 무지개를 좋아한다.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다. 무지개를 보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 무지개를 보면 누구나 ‘와’하고 탄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무지개는 빛의 파장에 따라 색의 경계가 달라지기에 각 문화권마다 색의 개수가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으로 인식하고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 히브리 사람들은 무지개를 ‘케쉐트’라고 해서 행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긴다. 영국사람들은 무지개를 '레인보우'라고 해서 불행을 차단하는 것, 비극을 굴절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무지개를 '이립스'라고 해서 후광 또는 광채로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는 희망의 빛으로 여긴다. 우리들은 누구나 인생길을 걸으면서 무지개 보기를 원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삶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무지개가 아니라 구름이다. 비를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이다. 구름은 고난과 시련의 상징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구름이 있다. 때로는 역경의 구름이, 슬픔과 질병의 구름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이별의 구름이 우리를 둘러 덮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구름 속에 있는 비와 폭풍을 바라보지만, 어떤 사람은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본다. 물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도 달라진다. 노아 시대에는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시면서 지면에서 다 쓸어 버릴 계획을 하신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고, 120년 걸려 방주가 완성되자 하늘에서 창이 열리고 40주야 마치 물을 쏟아 붓듯이 비가 내렸다. 온 세상은 150일간 물에 잠겼고, 노아의 8식구와 배에 탄 짐승들만 살아 남고 지구에 호흡하는 모든 생물들은 다 죽었다. 노아가 배에서 내렸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제 노아를 통해 다시 시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먹구름이 끼일 때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기 때문이다. 구름도 하나님께서 주신다 창세기 9장 13절에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무지개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구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구름까지 없애신 것은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1년 365일 동안 비가 오지 않고,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땅은 말라 비틀어지고,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구름도 있어야 하고, 비도 와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모두 고통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야곱은 20년, 요셉은 13년, 다윗은 반 평생, 모세는 40년 혹독한 고난의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다 헤아려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구름도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 구름 속에는 반드시 무지개가 있다 창세기 9장 13절에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고 하셨다. 구름 속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시련 속에 승리가 있다. 십자가속에 부활이 있다. 눈물 속에 기쁨이 있다. 불 시험 속에 정금같이 연단되는 은총이 있다. 믿음이란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를 보는 것이다. 요셉의 인생은 먹구름 인생이었다.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려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후 요셉을 잊어버린다. 요셉은 가족에게, 이웃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먹구름' 인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먹구름 인생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결국 요셉의 꿈은 이루어진다. 오늘의 먹구름은 우리를 잠깐 힘들게 할뿐이다. 구름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내일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오늘의 시련을 이겨 나가시기 바란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이다 창세기 9장 13절에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언약은 모두 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보다 더 확실한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언약이다. 십자가 언약은 무지게 언약의 완성이다. 십자가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언약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홍수로도 씻을 수 없고, 유황불로도 씻을 수 없는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부활하게 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다. 무지개는 희미한 것이지만 십자가는 너무나도 선명한 것이다. 무지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우리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어떤 환상보다도 어떤 징조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이다. 십자가야말로 '구름 속의 무지개'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름 속에 있는 축복의 무지개를 바라보자.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리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풍성히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란다.

장윤재 교수2017-04-05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는 통일에 대한 열정과 기도가 뜨겁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필자가 많은 교회와 기독교 대학들이 추진하는 평화통일 프로그램에 자문활동을 하면서 깊이 느낀 것이 하나 있다. 통일에 대한 열정은 좋은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남북의 평화통일에 헌신하는 데 있어서 견지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째는 '상대방의 관점'이라는 원칙이다.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꾸리듯이, 통일도 서로 다른 남과 북이 만나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과정이다. 남북의 통일에는 상대방이 있다는 매우 기본적인 이야기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라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좋아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다. 한 배우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좋아할 것이라고 여기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좋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거기서 커다란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가 통일을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마다 먼저 물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북녘의 형제자매들은 무어라 생각할까. '상대방의 눈'에 나의 의도와 행동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 의식해야 한다. 그것이 결여되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추진하는 일도 일방적인 폭력이 된다. 남과 북은 '남'이다. 서로가 '남'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영영 '남남'이 된다. 분단 70년이 넘은 남과 북은 지금 '남'이다. '타자'다. 우리가 남남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상대가 나와 다른 타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잊고 있다. 두 번째로 한국교회가 잊고 있는 원칙은 '평화의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은 좋은 것이지만 통일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통일의 목적은 평화이고, 통일로 가는 유일한 길도 평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통일,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필자가 매우 놀라는 사실은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화로부터 분리된 통일은 위험하다. 평화를 잊은 통일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통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평화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 통일의 목적은 한반도와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항구적인 평화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잊고 있다. 세 번째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잊고 있는 한반도 통일의 원칙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남북의 통일은 사반세기 전 동서독이 이룩한 통일의 재현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북의 통일은 동서독의 통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류의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길을 여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많은 통일단체들이 겉으로는 평화적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독일 식 흡수통일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남북의 통일은 남한의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북으로 확장하고 이식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둘이 만나 '둘 다' 어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까지 이룬 우리나라가 매우 자랑스럽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이 체제를 고스란히 북으로 확장하고 이식하는 것이 진정한 통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통일은 북도 새로워지고 남도 새로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지구상 인류 전체는 동서독 통일 때와는 달리 커다란 생태적 · 문명사적 위기를 겪고 있다. 전 세계인이 피부로 느끼는 기후변화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제 한반도에서 일어나야 할 통일은 과거 독일의 모델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 전체 앞에 새로운 생명의 길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독일보다 한반도의 통일을 늦게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필자는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보다 더 멋지게, 더 훌륭하게 화해의 기적을 이루는 일에 부르신 것은 아닐까. '새 하늘과 새 땅'(이사야 65:17)을 창조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 전체를 새로 지어 열방 앞에 구원과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리라 믿는다.

김명전 대표이사2017-04-03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지난해 말 2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중에는 외국국적을 갖고 있는 동포의 숫자가 절반에 육박하는 80만 명을 차지한다. 체류 외국인 중에서 절반 정도(96만 2천 명)가 한국에서 취업해 일하고 있다. 대부분 단순노무직이다. 취업비자를 받아 일하고 있는 경우도 50%(55만 4천 명) 이상이 비전문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체류외국인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비율로는 4% 수준이다. 매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30만 명 가량이 들어오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체류외국인 증가 추세가 매우 가파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미 1990년 밖으로 나가는 인구보다 들어오는 유입자가 더 많아진 순이민국이 되었다. 당시부터 유엔이 정한 기준에 따라 후발 이민국가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순이민국임에도 아직 이렇다 할 이민정책이 없다는 점이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에서 마련된 이민정책이 없다 보니 체류외국인의 대부분이 단기 또는 일시 체류형이다. 체류외국인의 특징도 불법취업이 대부분이다. 취업의 유형도 부족한 노동력을 보완하는 방편으로 활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취업비자를 받고 입국해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중에서 4만 9천 명 정도만이 전문•숙련 인력으로 분류된다. 비취업비자 자격의 인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은 대부분 유학생, 재외동포, 결혼이민자 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인구절벽시대에 마주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민정책을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총출생아 수는 40만 6천 명이다. 사상 최저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이 1.17명으로 떨어졌다.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경제성장을 이끌 동력이 고갈 위기로 가고 있다. 출구가 안 보인다. 유럽의 난민정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통합과 안전에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있지만 경제적 관점에서는 다르다. 2015년 독일에 새로 등록된 기업 중 44%를 이민자들이 설립했다. 영국의 경우, 영국 평생거주자의 창업 비율은 5.3%에 불과하다. 반면 이민자 창업은 15.4%에 달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포춘 500대 기업에 드는 미국기업의 40% 이상이 이민자나 그 2세가 설립했다. 실리콘벨리의 벤처는 이민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우수한 전문인력 이민자들이 위기극복의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기업가정신을 불 붙이고 있는 사례들이다. 반면, 한국은 체류 외국인력 중 30% 정도만이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을 보유하고 있다. 2-3년 정도 체류하면서 기술이나 숙련노동을 익혀 귀국하는 단기 순환형이다. ‘이주근로자’ 원칙 때문이다. 전략이 없다. 올해는 인구 대재앙이 예측된다. 첫째, 신생아 40만 명 출산이 붕괴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은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생산가능인구(14세-64세)를 넘는 노령사회로의 진입이다. 끝으로 생산가능인구(3763만 명)가 올해 정점을 찍고 감소하게 된다. 인구 재앙에 대비한 이민정책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 핵심은 고급전문인력을 유인하고 정착하도록 하는 ‘정주화이민’ 정책이다. 미국도 세계의 우수인력에 이민문호를 개방해 국가와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민을 개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는 없다. 일본의 경우만 인구 1억 명의 경제규모로 선진국에 진입했던 예외적인 사례다. 2006년 1인당 국민소득(GNI) 2만 달러 진입 후 11년째 3만 불을 넘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다. 인구 3대 재앙은 추락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신현상 교수2017-04-03

독일의 메르켈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총리 등 글로벌 리더의 자문을 맡아왔고 [엔트로피] 등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최근작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에서 다윈의 적자생존형 인재 즉 '경쟁하는 인간'이 아닌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icus) 즉 '공감하는 인간'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 앞에 놓인 난제를 풀어나갈 주역이 되리라고 예측했다. 사회적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과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을 주도해 온 아쇼카재단의 창립자 빌 드레이튼(Bill Drayton) 역시 공감능력(empathy)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감능력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 경험 등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감능력은 빈곤, 질병, 교육격차, 환경오염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타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나의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들고,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솔루션을 찾기 위해 필요한 열정과 헌신의 원동력이 된다. 최근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스마트워치를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한 소셜벤처 DOT의 김주윤 대표가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솔루션을 도출한 좋은 사례이다. 김주윤 대표는 미국 워싱턴대학을 다니면서 두 번의 창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세번째 창업은 성공적이었지만 과연 이 사업이 본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 일을 하다가 내일 죽더라도 나의 삶에 후회는 없을 것인지 등 사업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아는 동생의 권유로 교회 모임에 나가게 되고, 도서관 봉사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시각장애인이 자기 몸집만한 점자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점자의 특성상 점자 성경책의 부피는 매우 크다. 예컨대 카톨릭성서공회에서 발간한 성경책은 가로 278cm, 세로 277cm에 6천여페이지에 달하는 크기이다. 그러다 보니 제작비용도 높은데, 개역개정판의 경우 20권으로 이루어진 점자성경 한 질의 제작비가 2007년 기준으로 3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도서관 입장에서는 점자 도서의 구매가격과 관리비용이 높다보니 점자로 된 장서 보유 숫자가 적다. 이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점자를 힘들게 배워봤자 읽을만한 컨텐츠가 별로 없으므로 점자를 배울 인센티브가 작아짐을 의미한다. 컴퓨터 속 글을 점자로 바꾸어 주는 점자 디스플레이가 나왔지만, 대당 300만원-1500만원에 달해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이렇다보니 전세계 2억 9천만의 시각장애인 중 95%가 점자문맹이라 한다. 김 대표는 시각장애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당 30만원 정도 하는 웨어러블형 스마트워치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황금의 펜타곤, 아시아 소셜벤쳐 경진대회 등 여러 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고, KAIST 연구진 등과 연결되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뮤지션 스티비 원더,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자발적으로 제품을 홍보해주었고, 미국의 Times, 영국의 BBC 등에 소개되기도 했다. 미래창조과학부, 중소기업청, 창업진흥원, 창조경제혁신센터, SK텔레콤 등 정부기관 및 기업의 지원도 잇달았다. 시각장애인들은 구매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업은 성공할리 없다는 주위의 우려를 비웃듯, 시각장애인들의 부모, 자녀, 친척, 친구 등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년 남짓한 기간에 선주문 포함 500억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이 주위의 많은 개인과 기관들의 공감을 낳고, 서로를 격려하고 돕는 가운데 공감대가 확산되어 인적/물적/기술 자원이 투입되고 사회적 문제가 혁신적으로 해결된다. 공감이 공감을 낳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모습은 마치 바이러스가 전염되어 큰 세력을 이루어가는 모습과 유사하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컴패션(compassion) 즉 긍휼이라 부른다. 미리암-웹스터 영어사전은 컴패션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줄여주기 위한 열정과 행동이 따르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공감(empathy)과 행동(action), 열정(passion)과 헌신(commitment)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시편 145편 8절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라고 찬양한 것처럼 긍휼은 하나님이 가지신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이다. 로마서 12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즐거워 하는 자들고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가 다른 이들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공감해야 함을 말한다. 또한 야고보서 1-2장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함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난한 형제자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 즉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적극적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말씀하시고, 야고보서 3장 13절에서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하신다. 베드로후서 3장에 따르면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 즉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이로 보아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믿음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지혜의 온유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 즉 지속가능한 행동방안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열정과 헌신, 그리고 지혜는 누구든지 구하는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공급될 것이다.

정재영 교수2017-04-03

정치의 계절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난 3월 10일에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12월에 예정이었던 대통령 선거가 5월 9일로 앞당겨졌다. 이르면 4월에 대선 일정이 잡힐 수도 있어서 ‘벚꽃 대선’이라고 했는데 5월로 확정되면서 언론에서는 ‘장미 대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주요 정당들은 당내 경선을 거쳐 대선 후보를 거의 확정했고, 이제 본격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유력 대선 후보들을 놓고 이들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누구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언론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대선주자들의 지지율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 대선주자가 한 달 넘게 1위를 독주하며 당선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다른 후보들이 격차를 줄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3자 또는 4자 대결에서는 유력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지만 2자 대결에서는 지지율 격차가 오차 범위 안으로 줄어들어 누가 당선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따라서 과연 다른 후보들이 후보 단일화를 이룰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보들을 둘러싼 다양한 정보들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를 포함한 루머와 괴담까지 퍼지고 있어 행정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총장이 대선 예비후보로 나섰다가 사퇴한 이유 중의 하나로 가짜뉴스를 꼽았을 정도로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가짜 뉴스는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 정점을 찍었다. 지난 달 이루어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대해서 SNS를 통해 '헌법재판관들이 거액의 돈을 받고 편파적인 판결을 했다'는 내용의 가짜 뉴스가 확산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당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가짜 뉴스를 엄단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정보들에 대해 내용의 진위를 따져보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비판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정치 토론의 불모지 선거철을 맞아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정치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지만 교회에서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정치 얘기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세상 얘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고, 더 큰 이유는 정치 얘기 잘못 꺼냈다가 교인들 사이에 싸움이 나고 분란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조차도 정치에 대한 설교를 하기를 매우 꺼리고 있다. 자신과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설교에 대해 교인들이 항의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도 생기기 때문에 설교자는 신중할 수밖에 없고 아예 정치 관련 설교를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정파적인 설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강단에서 특정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유권자가 선거에 대하여 갖는 고유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같은 기독교인이고 같은 교회의 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이것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 이슈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교인들 사이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듯이,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의 관점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 밖에서는 각 후보들과 그들이 내놓은 정치 공약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비판하기도 하며 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야 하는지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정작 교회 안에서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공약이 성경의 가르침이나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는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 기독인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후보가 성경의 관점에서 바람직하고 어떤 공약들이 기독교 가치에 부합하는지 면밀하게 따지고 선택할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도 정치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최근 정국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선거철에만 정치에 관심을 갖고 평상시에는 정치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를 근본적인 의미에서 ‘믿는 바에 대한 도덕적 실천’이라고 한다면 모든 국민은 철저하게 ‘정치적’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변혁시키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기독 시민에게 요구되는 참모습일 것이다. 토론의 활성화를 위해 여전히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에 토론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여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다. 토론의 제1 덕목은 경청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상대방도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그렇게 하면서 서로 의견도 조정하고 자기 생각에 부족한 점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토론하기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얘기를 하고 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말이 많은 것은 효율을 떨어뜨리고 덕스럽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한다. 교회가 기업과 같은 영리 조직에서 하는 것과 같이 신속성이나 효율성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조직인가 하는 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교회는 공동체이고 공동체성이 우선돼야 한다. 교회에서는 소수에 의한 일방 결정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씨름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때까지 이해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토론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고 정치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전래 초기 한국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되었고 자발성에 기초한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됐다. 시민 회의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는 민주주의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서 이제 교회에서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풍토가 자리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통해서 배우며 서로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교회 안에 토론의 장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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